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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Aug 07. 2020

운동 꽝이 중년에 시작한 달리기.

나를 나답게 만들어준 달리기

응답하라 시절의
체력장


내가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는 대학 입시에 체력장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대학 입학시험인 학력고사에(지금 수능) 가산점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20점이나. 그래서 예체능 시간이 거의 없던 고3 때도 체육 시간에 체력장 연습을 하러 운동장으로 나가고는 했었다.

나는 우선 100미터 달리기는 25초였고, 던지기는 폼은 투포환 국가대표급인데 아무리 있는 힘껏 던져도 바로 발 앞에서 데구루루 굴러가는 공을 보게 되고, 윗몸일으키기는 남들 거뜬히 20개 30개 할 때 7개 8개 하면 최선을 다한 거였다. 제자리 멀리 뛰기는 그나마 좀 나은 종목이었는데, 그 자리에 서서 두 팔을 풍차 돌리듯 휘저어 펄쩍 뛰어 제법 멀리 나갔어도 푹하니 주저앉는 바람에 모래사장에 남은 족적이 아닌 그보다 한참 앞에 웅덩이처럼 파인 엉덩이 흔적을 기록으로 남길 수밖에 없었다.

오래 달리기는 시간 내에 800미터를 완주하는 것이었는데 눈앞에 별이 보인다 싶을 정도로 뛰었는데도 시간 내에 끝내지 못했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매달리기였다.

매달리기는 높은 철봉에 두 손으로 잡아 매달릴 준비를 하고 있다가 "시. 작"과 동시에 초를 재는데 주르륵 빨랫줄에 널던 빨래 바람에 떨어져 내리듯 0초를 기록한 적도 있고 죽기 살기?로 버텨 5초를 기록한 적도 있다.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던지 체육선생님이 이렇게 물으신 적도 있었다."얘, 올라갔다 내려온 거니?"

린츠의 도나우 강변 마라톤 전날 친구들과 커피 마시러 간 노천 카페, 그날도 가마솥 날씨

운동 꽝이 운동 짱
친구를 두면....


어느날 단짝 친구 중에 한 명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너 체력장 점수 후딱 따서 오래 달리기 안 하고 쉬고 싶지 않냐?" 그렇다 종목별 점수가 충분 하면 800미터 오래 달리는 안해도 되는 것이다.

우리 때는 한 반에 70명이 넘다 보니 그 많은 애들 종목마다 모두 하려면 시간이 꽤 많이 걸렸다. 그래서 다른 종목 들은 오전 중에 두루 하고 오래 달리기는 점심 먹고 한참 더울 때 소화도 안된 배를 끌어안고 했어야 했다.

나는 100미터 달리기 15초 나오고 체육선생님 께체대 가라는 말을 계속해서 듣고 있던 친구에게 속으로는 ("이뇬아 그건 니나 가능한 일이죠 ") 하면서도 그 말도 안 되는 달콤한 제안에 홀라당 넘어가 그 친구와 점심시간마다 체력장 연습을 했다.

드디어 결전의 그날 체력장 당일 이 되었다. (아마 학력고사 필기시험 볼 때 보다 체력장 때 더 많이 떨었던 것 같다)

그동안 내게는 국가대표들 전지훈련 같았던 점심시간의 연습이 효력을 발휘했던지 100미터는 23초가 되었고, 매달리기는 17초가 나왔으며 제자리 멀리 뛰기는 만점이 나왔고, 윗몸일으키기는 자그마치 21개를 했다. 이 정도면 정말이지 장족의 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팔 빠질 듯 연습했어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던 던지기와 내 딴에는 엄청난 기록의 변화였으나 합산한 종목 들의 점수가 800미터 오래 달리기를 생략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나는 함께 연습해 주었던 친구 덕분에 (그 부럽던 뇬은 점수가 남아돌아 밴치에 앉아 쉬고 있었다) 간신히 시간 내에 800미터를 완주하였고 체력장을 무사히 합격 할 수 있었다.

우리 학교 체육 선생님 은 내 체력장 통과에 동네방네 현수막이라도 걸어 주실 듯 기뻐해 주셨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님의 체육교사 인생에서 체력장 합격 못할 까 봐 잠 못 자고 고민한 제자는 나 하나였다 했다.

독일의 동네 축제  벨하이데 키어메스 에서 동우회 별 퍼레이드에 참가중 저 가방안에 아이들 에게 뿌려줄 사탕 잔뜩^^

달리기 를 내가?


그리고 20대에 독일로 유학을 나오면서 운동이 삶의 일부인 사람들이 널려 있는 곳에서 운동 이라고는 숨쉬기 운동이 특기 인체 버티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딸내미 집에 놀러 오신 친정엄마와 독일 사람들 단체 버스 관광팀에 끼어 여행을 갔는데 거기서 운명처럼 딱 그 운동 잘하던 친구 같은 타입의 독일 친구 모니카를 만났다.

이번에는 모니카의 꼬드김에 넘어가 달리기 동우회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사실 조깅 동우회이지만 그 안에 노르딕 워킹 팀이 있다 해서 수다 떨며 걸어나 볼까 하고 들어 갔다.그런데 첫날 우리 동우회 회장인 울라가 나를 보자마자 "젊고 멀쩡해 보이는데 그럼 뛰어 "하는 게 아닌가?(알고 보니 노르딕워킹팀은 무릎등이 안좋은 70대 이상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몸치 인생에 그런 질문 첨이야 하는 표정으로 눈이 동그래 져서는 "내가?"라고 되물었다.

말도 안돼 라며 얼떨결에 뛰기 시작한 조깅 동우회에서 2년이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2018년 6월 오스트리아 린츠 국제 여성 미니 마라톤 대회

도나우 강가의 기적

그해 여름 우리 조깅 동우회 에서는 오스트리아 린츠에서 열리는 국제 여성 미니 마라톤에 단체로 여행을 겸해서 참가 한다고 했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있다고 나는 여행을 겸해서 라는 말에 솔깃해 따라가서는 40도를 웃도는 폭염에 녹아내릴 듯한 아스팔트 길 장장 5킬로 미터나 되는 미니 마라톤에 얼렁뚱땅 참가하게 되었다.

친구들은 중간에 못 뛰겠으면 그냥 걸어도 되니 부담 갖지 말라며 달리기 대회에 머리털 나고 처음 참가하는 나를 다독여 주며 앞쪽으로 세워 주었다.

나도 속으로는 걷기도 힘든 이 더운 날 운동 꽝인 내가 어떻게 5킬로 미터를 뛰겠나 중간에 빠져나가야지 라고 생각했다.

번호표를 앞뒤로 붙인 체 신호음이 탕 하고 울리자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가 달려 나갔다.

앞쪽에서 뛰다 점점 뒤로 밀려 나고 있었고 달아 오를 때로 올라 쩔쩔 끓는 아스팔트의 온도는 발바닥을 태울듯 했다.그열기에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기가 버거 다. 어느순간 한참을 앞서서 뛰던 친구 크리스텔이 뒤처지더니 내 옆에서 뛰고 있었다. 얼굴이 토마토 같던 그녀는 쓰러질 듯 호흡이 흐트러 졌다.그동안 각종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던  친구인데 더운 날씨에 혈액 순환에 문제가 생겼던 모양이다. 나보다도 점점 뒤처지던 그녀는 급기야 자신은 도저히 못 뛰겠노라며 걷기 시작했다. 나는 순간 나도 걸을까 했다. 그러자 눈치 빠른 크리스텔이 너는 이번 대회가 처음인데 완주해야지 하며 등을 떠밀었다. 뛰면서도 크리스텔이 다른 참가자와 잘 걷고 있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는 이를 악물고 달렸다.

햇빛 받아 눈부시게 흐르던 도나우 강물에 눈길 주지 않고 옆길 가쪽에 서서 마라토너들이 지나갈 때마다 휘파람과 박수로 응원해 주던 수많은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고 오로지 결승점 만 노려 보며 달렸다. 고개만 살짝 돌려도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버릴 것 같고 옆길로 샐 것 만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만 보고 끝까지 달려 닿지 않을 것 같던 결승점에 골인했다.

십 대의 끝자락 고3 체력장에서 800미터도 간신히 뛰던 내가 48세 중년의 나이에 5킬로미터 미니 마라톤 국제 대회를 그것도 폭염 이라는 악조건 속에서 완주한 것이다.

친구들의 환호 소리를 들으며 마라톤 참가 메달이 목에 걸리던 순간,그때의 저릿한 감격이란,내게는 올림픽 메달을 목에 걸었던 선수 들이 느꼈을 그 벅찬 감동 그대로였다.

우리는 가장 많이 알 것 같은 자기 자신에 대해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때까지 나는 누군가에게 꼬심을 당해?또는 등떠밀려 했던 것들이 정말은 내가 하고 싶었지만 시작할 용기가 부족했던 건지 알지 못했다.알고 보니 나는 내가 알고 있던 것 보다 훨씬 근성있고, 충분히 독했으며 숨차게 달리는 것을 좋아 하고 있었다.

그 여름 폭염 속을 그때 까지의 나의 한계를 넘어 달리며 나는 그렇게 나다운 나를 만났다.  

내일 나는 또다른 나의 한계점을 넘으며 더 다른 나를 만날 것이다.

지금 어딘가에 나도 모르는 나를 만날 용기가 부족해 망설이고 있는 당신이 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 기회를 주저 하지 말라고 이야기 해 주고 싶다.어쩌면 당신은 알고 있는 당신이 전부가 아닐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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