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서울이 없어도 된다. 뭐 어떤가, 그냥 가자.
내 머릿속에 혹은 내 마음속의 심지를 잡아준 박웅현 작가가 한 말들이 참 자주 맴도는 나날들. 박웅현 작가는 일전에 ‘한국 사람들은 박스에 무언갈 넣는 걸 좋아하는 거 같다 ‘는 이야기를 몇 번 한 적이 있다. 그리고 최근 '이혜성의 1% 북클럽'에 나와 같은 이야기를 다시 언급했다. 그가 한 말은 이러하다." 우리 사회는 외부에 지향점을 찍어놓고 '저렇게 돼라'가 너무 강한 사회예요, 어디서 칼럼을 썼는데, 우리나라는 20대 여자가 들어가야 될 상자가 있고, 20대 남자가 들어가야 할 상자가 있고, 40대 가장이 들어가야 할 상자가 있는 거 같아요. 그래서 이제 추석이나 명절이 되면 다 고문을 당하는 거잖아요. 너는 왜 결혼을 안 하니 너는 왜 그러고 있니 이러잖아요. 바깥에 점을 찍어놓고, 너는 상자 바깥에 있는 거야 지금. 빨리 들어가!라고 얘기하는 거거든요."
이 문장이 다시 떠오르는 대화를 하게 되는 상대들이 있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학교, 직업, 나이, MBTI, 거주지를 당연하게 줄줄이 물어보는 경우인데. 사실 굉장히 무례하다고 생각해서 자랑하고 싶은 내 인적사항마저도 대충 던져서 대답해 버리고, '혹시 뒷조사하느냐'라는 식으로 농담 식으로 맞받아치려고 노력한다. 웃으면서 대답하지만 사실 꽤 많이 언짢고, 이런 질문을 받을 때 받는 인상은 대략 '이 사람 머릿속에는 어떤 선형적으로 생긴 피라미드나 폴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받는다. 그리고 상대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제대로 자신 있게 답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거 같다. 한 편으로는, '이 사람 생각의 본인은 어떤 피라미드나 폴더 안에 들어가 있는 걸까' 궁금해진다. 절대 알 수 없지만 그냥 그 프레임의 형태가 느껴질 때 개인적으로 느끼는 어떤 속상함, 혹은 아쉬움이 있다.
하나 짚고 가고 싶은 건, 분명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사회적 압박은 만국 공통이다. 어릴 적 자주 듣던 Little boxes라는 노래 가사에도 비슷한 맥락이 있다. '다 똑같이 생긴 작은 박스들이 있다. 다들 전부 다 똑같은 박스 안에 들어가서 대학을 가고, 회사에 가고, 아이를 낳는다. 아이는 학교에 가고, 여름 캠프를 다녀와선 대학이라는 박스에 담긴다. 그렇게 회사에 가고 그렇게 다 똑같이 생겨서 박스에 담긴다'라는 가사의 노래다. 다들 그냥 정해진대로 박스에 담겨 사는 것을 노래한 1960년대 미국의 노래이다. 또 비교적 최근 콘텐츠인 'How I Met Your Mother'라는 미국의 드라마는 거의 모든 시즌이 이런 맥락에서 방황하는 청춘들에 대한 내용을 다룬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만났던 다른 국가의 친구들도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우연히 터키 대학 졸업식에서 만나 자주 왕래했던 친구들도 빨리 취직하고, 괜찮은 월급을 받는 데에(물론 더 큰 국가적 차원의 맥락이 있겠으나) 꽤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박웅현 작가가 지적한 것과 같이, 한국은 이게 일종의 사고방식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향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현상에 대한 과소평가이다. 당연히 뭐든 장점과 단점이 있다. 이러한 프레임 덕분에 성장하기 위한 커리큘럼이 확실히 존재하고, 그 길대로 움직이면 결함 없이 성장할 수 있다. 효율적인 시스템이다. 또 개인적으로는 일본, 싱가포르보다 어쩌면 압박이 덜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양성도 나타날 수 있는 수준이라고도 생각한다. 다만 단점은 불행해지기 정말 쉬운 구조라는 것이다. 정해진 박스 커리큘럼에서 벗어났을 때 개인이 느끼는 어떤 불행의 정도가 압도적으로 큰 것 같다. 많은 요인들이 개인이 불행을 느끼는 데에 열심히 조력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최근 만난 많은 친구들이 방황하는 것을 보면서 나의 방황기를 똑같이 떠올리고, 내가 당시 느꼈던 어떤 불안과 스트레스가 어디서부터 출발되었는가 곰곰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지금 계속 말하고 있던 그놈의 박스가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박스 안에 못 들어갈 것 같아서 날 서 있는 친구들과, 한 치 앞도 모르지만 일단 박스 안에 들어가 있어 안도하고 있는 친구들을 번갈아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다 보면, 도대체 뭐가 맞는지 모르겠다. 그 쯤에서 그냥 중간에 서서 담배를 한 대 피우면서 본질을 다시 떠올린다.
모로 가도 서울로 가는 삶이 좋은 거 같다.
같은 상황을 보고선 이걸 불행으로 볼 것인지, 행복으로 볼 것인지 그 시선이 참 한 끗 차이이다. 내가 박스 안에 못 들어갔다는 사실을 '낙오'로 정의하느냐 '다른 길'로 정의하느냐에 따라서 행복 정도가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버스를 놓친 것을 '낙오'라고 생각하면 다음 버스가 오기를 목 빠져라 기다리면서, 버스 전광판만 전전긍긍하며 보게 된다. 버스를 놓친 것을 '다른 길'로 정의하면 자전거를 타거나 뛰거나, 지하철을 타게 된다. 혹은 다음 정거장에서 비슷한 길을 가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탈 수도 있다. 경험의 폭이 늘어난다. 거기서부터 행복의 폭도 늘어난다. 이 말을 들은 누군가는 나에게 '우리 마을엔 버스가 한 개 밖에 없고 배차간격이 세 시간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은 절대로 한 개의 버스가 세 시간 간격으로 오는 구조가 아니다. 삶은 수도 없이 많은 버스가 1초 단위의 배차간격으로 오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삶이라는 버스는 아무거나 타면 일단 어디든 간다. 원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지만, 꼭 그거 아니어도 탈 수 있는 버스가 너무 많다. 어느 버스에는 사람들이 줄 서서 막 올라타려고 하기도 하고, 어느 버스는 아무도 안 타려고 하지만 일단 버스가 엄청 많다. 그래 그런가, 나는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빙빙 돌아서 10년이 걸려도 서울로 가는 길이 있는 거지 않느냐.
또 누군가는 '서울이 어딘지 모르겠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럼 타지 마라. 안 죽는다. 그냥 정류장에 서서 다른 사람들 타는 거 구경하기도 하고, 잠깐 편의점 들러서 바나나 우유 하나 사 먹어라. 안 죽는다. 그러다가 뭐 재밌어 보이면 그냥 그거 타고 가라. 그럼 어떻게든 된다.
이쯤에서 다시 박스 이야기로 돌아가면, 나는 내가 박스에서 벗어났다고 생각이 들었을 때 그냥 '에라이, 다른 박스 들어가지 뭐' 하고 어디서 마트에 들어가 종이 박스 하나 주워서 그 박스 안에 들어가 버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들은 절대 모르는 그 박스의 향을 맡고, 재미를 찾고, 어느 순간 그 박스에서 벗어나 마냥 걸으면서 밥도 먹고, 친구도 만나고, 그러다가 또 그냥 어디 길에 널브러진 박스 하나 주워서 다시 자고. '내 박스가 뭐더라' 하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박스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박스를 들어가려고 했었는지 다시금 생각해 보는 그런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다 들어가는 박스 안에 나를 욱여넣기 시작하는 순간 너무 많은 것들이 불행해지는 것 같다. 비교가 정말 끝도 없이 가능하다. 황금으로 치장된, 내 처지가 완벽히 나아지는 큰 박스 안에 정확히 들어간다고 해도, 그 안에서 딱딱한 박스 모양에 유기체인 나의 몸을 우드득 맞추느라 아프고 불행해지는 것 같다. 박스를 기준으로 낙오와 성취 두 개의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순간부터 너무 힘들어지는 것 같다. 단, 그 노력을 통해 얻는 성취는 값지다. 눈물과 땀과 피로 범벅된 성취이다. 박스 안에 사람이 많은 만큼 소유할 수 있는 것들도 많고, 그것을 통해 새롭게 생산하는 것들도 폭발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언제나 '꼭 이걸 안 해도, 다른 걸 할 수도 있다'는 그런 마음가짐이 좀 불행의 폭도 줄여주고 행복의 폭은 늘려주는 거 같다. 그 마음가짐이 소유보다 더 많은 풍요를 주는 것 같다. 그래야 덜 불행한 거 같다. 그쯤에서 박스 안에서 다른 박스가 보이는 것 같다. 그 쯤에서 머릿속에 선형적인 피라미드 혹은 박스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 즘에서 70억 명의 사람들이 70억 개의 박스 안에 들어가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 즉, 박스가 별 소용이 없어지는 것 같다.
그렇게 살긴 어렵겠으나, 그렇게 살아보려고 '노력'하려고 한다. 그게 좀 행복한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