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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준호 Feb 22. 2020

가끔 천천히 여유있게

 저마다 자신만의 일하는 바이오 리듬을 갖고 있다.

 ※ 바이오 리듬 : 생물체의 활동에서 일어나는 신체, 감정, 지성의 주기적인 변동을 말한다(다음 사전) 


 "커피 대신 낮잠을 선택할까."

 

 어느 날 하루를 둘로 나눠 써 보기로 결심했다. 마침 다이어트도 필요했다 싶어 팀원들에게 점심을 패스하겠다고 선언했다. 팀원들이 나가자마자 의자를 뒤로 쭉 펴고 고개를 늘어 뜨려 낮잠을 청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수업시간에 자는 학생들을 깨우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쉬는 시간에 깨우는 법은 없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찾아왔다. 뒤늦게 나서는 다른 팀 사람들이 내게 밥 먹으러 같이 가자고 말을 시켰다. 정중히 사양하고 다시 잠이 딱 들기 직전 "과장님, 어디 아프세요? 병원은 다녀오셨어요?" 약속이 있었는지 가장 늦게 나가는 직원이 또 말을 걸었다. 걱정해주는데 화를 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게 어찌어찌하다 잠이 들었나 했는데 벌써 팀원들이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그래,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게 더 급선무였다.

 회사의 점심시간은 업무 시간을 나누는 가운데 기준이 된다. 오후의 시작이 회의나 발표라면 점심시간이 끝날 때쯤 마음이 분주해진다. 점심시간도 근무 시간으로 간주해 잠을 자는 것 자체를 의아해하거나 못 마땅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점심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내는가에 대한 선택은 개인의 취향 아닌가. 난 막간을 이용해서 낮잠을 잘 때면 중간 쉼표의 여유를 느낀다. 오로지 나를 위한 충전 시간이니까.

 지난여름 베트남에 출장을 었다. 한여름의 날씨는 습하고 숨이 막히게 더웠다. 사업장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카트에 타고 있었다. 공장이 넓어서 골프장처럼 카트로 다니는 건가 했는데 진짜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한 시간 걸으면 한 시간 쉬어야 하는 무더위 덕분이었다. 그들은 카트 말고도 무덥고 습한 날씨를 이겨내는 나름의 노하우가 있었으니 바로 낮잠이었다. 점심시간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모두 퇴근한 줄 착각이 들 정도로 조용했다. 창가에 블라인드는 내려 있고 불이 다 꺼져 캄캄했다. 다를 밥 먹으러 가서 아직 안 왔나 보다 싶어서 사무실을 휘젓고 다니다 뭔가 느낌이 싸했다. 몰래카메라를 당하고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처럼 말이다. 처음에는 내 눈을 의심했다. 진남색 재킷을 입고 있는 직원이 책상에 엎드린 채 잠을 자고 있었다. 마치 학창 시절 쉬는 시간 쪽 잠을 자던 그 자세로 말이다. 그제야 여기저기 자리마다 직원들이 잠을 자는 모습이 차례로 보였다. 여름 농활 때 시골에서도 가장 더운 시간대에는 그늘에서 쉬고 낮잠을 자는 게 규칙이었다. 이처럼 낮잠 문화는 하루를 반으로 쪼개 보내는 여유, 더운 나라에서 일 잘하는 팁이었다. 에어컨의 빵빵한 냉방 속에서 햇볕이 가려진 사무실의 모습은 마치 느티나무 그늘 아래 돗자리를 편 것 같았다. 그 위에 대자로 누워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점심 먹고 커피 한 잔 마시는 것처럼 낮잠 한 숨 자 볼까.


 "정숙도 좋지만 적당히 좀"


 경력사원으로 입사한 D 과장이 있었다. 그녀는 헤드폰을 껴고 일하는 모습을 종종 보일 정도로 일할 때만큼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녀는 가볍게 음악이 흘러줘야 긴장이 풀리듯이 일도 자연스럽게 잘 된다고 말했다. 스타벅스나 레스토랑에서 음악을 괜히 틀어 놓은 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무서운 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이었다. 타자 치는 소리가 거슬릴 정도로 조용한 사무실은 오히려 직원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슬리퍼 끄는 소리 내지 마!" 학창 시절 잔소리처럼 들어 보았을 말이다. 놀랍게도 D 과장은 비슷한 말을 회사에서 들었다. '화장실 다녀올 때 구두 소리 좀. 이사님 거슬릴 수 있으니까 사무실에서는 운동화 좀 신고 다녀요.' 상사로부터 받은 메시지였다. 다음은 신입사원 K의 일화이다. 그는 신입이었기 때문에 임원 주관 회의를 사전 세팅해야 했다. 시작 십오 분 전부터 빔 프로젝터 화면은 이상 없는지 의자가 부족하지는 않은지를 체크했다. 테이블 위에 참여자 수만큼 물병을 깔아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곧 회의가 시작되었고 임원 앞에서 각자 이번 달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엇을 할 계획인지를 브리핑했다. 중반쯤 지났을까 K 사원은 옆 좌석의 L 과장으로부터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숨 죽여.' 갑작스러운 문자에 K는 당황했지만 그냥 조용히 가만히 있으라는 거겠지 싶어 침묵을 지켰다. 다음 메시지가 도착했다. '죽이라니깐' K는 식은땀이 흘렀다.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는데 자꾸 죽이라니 도무지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혹시 대화의 흐름을 끊으라는 의미인가 싶었다. "흠! 흠!" 헛기침을 했는데 인상을 쓰는 L 과장의 얼굴을 보니 이 또한 답이 아닌 게 분명했다. K는 이제 될 대로 돼라 싶어 잘 모르겠다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L 과장은 K의 눈을 노려 보며 마지막 메시지를 보냈다.

 '여기 네 코 숨소리만 들린다. 조용히 숨 쉬라고!'

 함께 일하는 공간에서 서로를 배려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상사가 직원들을 지배하고 요구하는 것은 반대하고 싶다. 윗사람의 신경을 거슬릴 것만 같아 몸 저리를 치는 모습, 파블로프의 개처럼 윗사람만 보면 즉시 반응하는 반사 신경처럼 말이다. 진정한 배려를 받고 싶다면 스스로 실천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럼 아마 동료들은 절로 닮아갈 것이다.


 "두 발의 자유는 역시 맨 발일 때지."


 급하게 뛰지 않아도 충분한 걸음걸이가 좋았다. 슬리퍼를 신을 때가 그랬었다. 학교 다닐 때 삼선 슬리퍼는 교내에서 신는 모두의 실내화였다. 성인이 되고 나서 슬리퍼는 어떤 용도로 쓰이고 있을까. 집안에서 거실 청소를 할 때 신는다. 사무실에서 책상 밑에 두고 신는다. 바다에 놀러 가서 모래사장을 걸을 때 신는다. 더운 나라에서는 회사에서 슬리퍼를 신고 일을 할 뿐 아니라 다양한 색과 디자인의 슬리퍼가 유행을 타고 직장인 인기 아이템이라고 한다. 맨 발과 슬리퍼의 조합은 반바지, 츄리닝, 후드 티처럼 편하고 자유로운 옷차림을 상상하게 한다. 반대로 검정 양말과 구두는 정장, 유니폼처럼 공식적인 미팅을 위해 입은 것처럼 형식적인 옷차림을 떠오르게 한다. 회사원은 보통 구두, 운동화를 신고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슬리퍼는 비즈니스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반면, 비즈니스 차림은 일하는 공간, 시간을 명확하게 구분한다. 신는 순간부터 무슨 일을 해야 할지 미션을 제공하는 것과 같다. 마치 신데렐라가 드레스를 입고 공주처럼 변한 것처럼 당당한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을 시켜주고 스파이더 맨이 슈트를 입으면 180도 달라지 듯 이미지가 뒤바뀐다. 만약 우리나라도 회사에서 슬리퍼를 신고 다니면 어떨까. 굳이 공식적, 형식적이라는 불편함 없이도 일에 집중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높다면 말이 된다. 근무 시간, 장소, 형태 등 근로자에게 근무환경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일을 하는 것만으로 스트레스가 많고 신경 쓸 게 셀 수 없이 많을 텐데 신발 하나만큼은 좀 봐주면 어떨까. 화장실 갈 때 운동화로 갈아 신고 다녀와서는 책상 아래서 슬리퍼를 몰래 신어야 한다면, 지금 2020년이 맞은가. 단순하게 슬리퍼 신었다고 예의가 없고 일 할 자세가 안 되어 있다고 선을 긋기보다 '회사를 집처럼 편하게 일하는 주인의식을 갖고 있구나'라고 바꿔 생각해 보면 어떨까. 효과적인 동기부여 방안은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무언가를 더 잘해주는 것보다 불편하게 느끼는 것을 최소화해 주는 게 최선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오늘 바쁘고 내일도 바쁠 게 뻔하다. 작년에도 그 전년도에도 그랬다. 그러니까 가끔은 천천히 여유있게 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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