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가 많아요.
여섯 명.
그 중에 다섯 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딘가 이기적이고, 무심한 아이였습니다.
부모님, 형제들 챙기는 걸 잘 못해요.
언니, 오빠들이 우선이라고 펄쩍펄쩍.
엄마, 아빠는 나만 싫어한다고 고래고래.
우리 집엔 내 편이 없다고 투덜투덜.
심부름은 꼭 나만 시킨다며 삐죽삐죽.
서러움은 혼자서 끌어안고,
애써 괜찮은 척 했던 아이였어요.
입으로만 애교 부리고, 다정한 척 했죠.
그렇다고 전화를 자주 드리지는 않았어요.
내 삶으로 돌아오면 무소식이 희소식.
그럴 땐 무뚝뚝 딸이었네요.
"어. 나야 잘 살지. 걱정을 마셔요."
짧게 통화하고 바로 끊으려 했지요.
첫 월급 받고 내복 한 벌 사드리지 않았어요.
생신이라고 찾아 뵙지도 않았습니다.
기억나는 대단한 선물도 없어요.
그런데도요.
불효녀라든지, 부족한 딸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성격은 아빠를 닮은 아빠 딸이니까요.
성질머리도 아빠 닮아 제멋대로니까요.
엄마, 아빠가 저를 그렇게 낳으셨습니다.
1941년생이신 아빠는요.
전형적인 그 시대의 아버지 모습 그대로이세요.
지독히도 가부장적이시죠.
당신 말씀은 정답뿐이라고 하시면서요.
부모 자식 간에도 계산은 철저히 해야한다는 철학을 꿋꿋하게 고수하십니다.
한 번은 종합 병원에 같이 갔다가요.
키오스크 사용이 어려운 아빠를 대신해 병원비를 납부했어요.
기억으로는 2만원이 안 되는 금액이었어요.
"병원비 얼마 나왔냐?"
"얼마 안나왔어요. 괜찮아요."
"얼마야, 정확히 얘기해.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에잇, 증말. 만 원이요."
"그럴리가. 영수증 보여줘라."
영수증에 적힌 금액 그대로 돌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씀.
"네게 남겨 줄 재산 같은 거 없다. 줄게 없으니 받을 것도 없다."
"아, 네네. 그러셔요."
10년 쯤 된 이야기 같아요.
결혼 후, 명절이나 생신에 용돈을 드려도 받지 않으셨어요.
손자인 우리 아이들이 졸업, 입학 때도 따로 봉투를 주신 적은 없었습니다.
무슨무슨 날이면 봉투가 오가는 시댁과는 비교가 되더군요.
제가 잘못한 게 없는데도요.
괜히 남편 눈치를 보게 되더라고요.
아이들에게는 친정 방문 전에는요
미리 설명을 해야 했어요.
"우리 아빠는 그런 분이셔."
"얘들아, 외할아버지는 그렇게 하신단다."
손자들이 귀엽다고 안아주시거나 기저귀를 갈아 주신 적도 없어요.
"아프지 말게 잘 키워라."
짧게, 가끔은 질리도록 길게, 말씀을 하실 뿐이었죠.
오십년을 살았습니다.
시간은 그래도 '달라짐'을 주는군요.
내 얼굴을 통해 엄마를 만납니다.
내 행동에서 엄마의 지혜를 찾습니다.
내 반응에서 아빠의 정신력을 따라갑니다.
내 결심 안엔 아빠의 강단이 있습니다.
엄마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아들.
"엄마 같은 엄마는 없어."라는 딸.
저를 따르던 회사 후배들.
몇 회째 연장하시는 미라클 주니 멤버님들.
세월과 함께 저도 변합니다.
부모님의 삶을 조금은 따라합니다.
그분들 덕분에 따뜻한 말도 듣지요.
좋은 분들도 계속 만납니다.
엄마, 아빠의 딸로 태어나 감사합니다.
언니, 오빠의 형제로 자랄 수 있어 고맙습니다.
첫 문장을 쓸때는요.
다른 이야기를 쓰려 했던 글이었어요.
쓰다 보니 글이 이렇게 흘렀네요.
올해 설, 세배를 하던 날.
아빠가 고등학교 입학하는 손녀에게 봉투를 주셨습니다.
아빠는 말없이 손을 내미셨습니다.
백일기적 - 나를 쓰는 시간.
100일 동안 글을 쓰며 나를 찾아가는 여정.
지금 그 길을 걸어가는 중입니다.
100일 후, 변화를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