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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Nov 18. 2024

무제 0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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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갑게 식은 공기는 서일을 채근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채로운 계절만큼 기온의 낙차가 큰 서울은 자신을 딛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매 순간 다른 결의 강인함을 요구하는데, 서일의 결은 아쉽게도 겨울과 잘 어우러지지 않았다. 며칠새 급격히 날카로워진 바람을 맞으며 그는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이런 주말엔 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게 상책이었고 또 이를 퍽 즐겨하는 서일이었지만, 상책대로 살아가는 호사는 쉽사리 찾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기에 고개를 몇 차례 내저으며 뜬구름을 머릿속에서 떨어냈다. 오늘의 그에겐 날씨를 빼고도 생각해야 할 일들이 한아름 실려있었기에 해찰할 새가 없었다.


서일의 오늘은 이 주 전 친구들과의 모임 자리에서 비롯되었다. 이제는 십 년도 더 지난 기간을 알고 지낸 대학 동기들과의 만남은 편안하면서도 즐거운 자리였고, 그 시간의 길이만큼이나 다채롭게 쌓인 이야기들이 서로의 사이를 오갔다. 개중에는 언어가 정제되기 이전부터 살아남아온 유구한 소재들도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단연 사랑이었다. 제각기 다른 모양으로 영글은 감정들은 일렁이는 바다 위의 윤슬처럼 매 순간 다른 모습으로 빛났다. 누군가의 사랑은 화마와 같이 일순간 발산하기도, 또 다른 이의 사랑은 구들장처럼 은근하게 마음을 데우기도 하였다.

"혹시 내 친구 한번 만나볼래?"

서일의 옆에 있던 지우가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 응, 좋아 고마워."

망연한 기색 없이 서일은 대답했다. 혼자인 시간을 기꺼이 아끼기는 하지만 다른 이와 함께하는 시간을 무작정 배척하지만도 않던 서일이었다. 그렇게 지우에게 감사를 전한 후에 서일은 다연의 연락처를 전달받았고, 그들은 이 주 뒤 토요일 저녁에 만나기로 하였다.


열차에 몸을 실은 서일은 차창밖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딱히 그 너머의 어떤 존재를 응시하고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을 함께 흘려보내고 있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이름과 나이 정도인 생면부지의 타인을 만나는 것은 생각보다 큰 감정을 필요로 하기에, 그는 입술을 깨물며 나름의 내적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그는 인파에 실려 지하철 역을 나섰다. 이제 막 어스름이 깔린 주말 저녁의 하늘은 생경한 풍경을 차분하게 감싸고 있었고, 조금은 여유롭게 집을 나섰던 과거의 자신 덕택에 서일은 차분하게 땅을 지르밟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다연은 아직 식당에 도착하지 않은 듯했기에 그는 식당 앞에 서서 주변을 톺았다.

"혹시"

"네, 안녕하세요. 다연 씨 맞으시죠?"

식당 안이 아닌 문 앞을 목적지로 삼았던 둘은 그렇게 서로임을 빠르게 직감하고 옅은 미소를 주고받은 후에 문을 열고 식당 안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혹시 예약하셨을까요?"

"네, 6시 반에 '이서일'로 예약했습니다"

"네,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과하지 않게 친절한 직원의 안내에 따라 둘은 두 명 분의 식기가 준비되어 있는 자리로 향했다. 눈과 입으로 친절을 그리려 노력하며 서일은 의자를 빼고 자리에 앉았다.


"오는데 오래 걸리셨어요?"

자리에 앉은 다인은 서일에게 인사를 건넸다. 차분하지만 곧게 뻗어나가는 목소리였다.

"한 40분 정도 걸린 것 같아요. 다연 씨는 오시는데 오래 걸리셨어요?"

"아니요, 저도 그 정도 걸렸던 것 같아요. 꽤나 딱 중간지점이었나 봐요."

베이지색 니트를 입은 다연은 소매를 가다듬으며 서일을 바라보았다. 서일 또한 그런 다연에게 자연스레 눈을 맞추었다. 눈이 영혼의 창이라느니 하는 현학적이고 비유적인 표현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를 주고받는 행위가 서로의 대화를 더 깊은 곳까지 이어줌을 후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식사는 어떤 걸로 시킬까요? 혹시 못 드시거나 싫어하시는 음식 있으세요?"

서일이 다연에게 물었다.

"아니요, 따로 못 먹거나 싫어하는 건 없어요. 그러면 음... 이거랑 이거 둘 중에서 우선 고를까요?"

"네 좋아요. 그러면 둘 중에서는 이걸로 해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거 괜찮으세요?"

"네 그걸로 해요!"

그렇게 그들은 둘 사이에 놓여있던 메뉴판을 치우고 서로에게 온전히 집중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고작 몇 시간만으로 타인을 이해하려는 것은 오만에 가까운 일이겠으나, 서일과 다연은 사실 여하를 차치하고서라도 보다 깊은 속내까지 가늠해야만 했다. 관계란 그렇게 쉽사리 손에 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하물며 사랑은 보다 깊은 곳까지 서로를 이해할 것을 요구받는 일이기에 서일의 머릿속은 평소보다 몇 곱절은 더 빠르게 점멸하고 있었다.


서일과 다연은 취향과 취미, 선호와 불호의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합치를 바란다기보다는 크게 어긋나지 않는지 서로의 경계를 맞대어보는 듯하다고 서일은 잠시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다연은 그와 크게 어긋나지 않았고, 그렇기에 서일은 관계의 결착 시점을 조금은 더 유예하고 싶었다.

"다음에 한 번 또 만날까요?"

후회가 남지 않을 문장을 찾아 중언부언을 맴돌던 서일은 짧은 의문문을 내뱉었고, 다연의 입이 떨어지기까지 서일은 태연한 얼굴 아래 그렇지 못한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결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 그래요."

여진(餘震)이 일던 서일의 내면은 그제야 약간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고, 그와 다연은 조금 더 서로를 바라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식사를 마친 서일과 다연은 식당을 나섰고, 카페에 가서 대화를 조금 더 나눈 후에 헤어져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방문을 열고 의자에 걸터앉은 서일은 하루를 톺았다. 로운 사람, 새로운 사랑을 찾는 과정은 이를 통해 얻게 될 감정보다 더 큰 감정을 내놓을 것을 태연자약하게 요구한다. 이는 새로운 만남을 위해선 필수불가결했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누수 또한 야속하게도 막을 수 없 일이었다. 이제는 격정보다 안정의 관계를 갈망하는 그였지만, 안정을 손에 쥐기 위해선 어느 정도 흔들려야만 함을 그는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로의 흔들림이 한데 어우러져 공명할 수 있기를 기약하며 서일의 오늘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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