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 때문에 무너져 내린 이들의 절망의 굴레
2025년 12월 16일에 'LG아트센터 서울'에서 연극 <타지마할의 근위병>을 보고 왔다. 본 작품은 타지마할의 두 근위병 '휴마윤'과 '바불'이 이끌어나가는 2인극으로, 대비되는 성향과 가치관을 지닌 불완전한 두 인물의 대담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의구심을 유발한다. 아래에 작품의 구성과 감상을 남긴다.
타지마할의 외곽에서 새벽 시간에 근무를 서는 말단 근위병인 휴마윤과 바불의 대화로부터 작품이 시작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이들의 대화 주제는 타지마할로 넘어가게 된다. 장장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어진 타지마할이 다음 날 세상에 공개될 예정이었고, 휴마윤이 들은 소문에 의하면 타지마할을 만든 건축가가 인부 및 석공 등 타지마할을 함께 만든 이들과 새벽에 다른 이들보다 먼저 타지마할을 보고 싶다고 황제에게 요청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거절당했고, 심지어 앞으로는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건축물이 지어지지 못하게 하기 위해 건축가와 노동자들의 손을 자르라고 명했다는 소문이 있었다고 얘기하던 휴마윤과 바불은 이를 믿지 않으면서도 만약에 그런 일을 해야만 한다면 말단인 자신들에게 일이 넘어올 것이라고 말한다 얼마 후 동이 트면서 타지마할의 모습이 드러나고, 앞을 보며 경비를 서야 하는 본분을 잊을 만큼 아름다운 타지마할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긴 둘은 뒤를 돌아 타지마할을 바라본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며 작품은 본격적인 사건을 다룬다.
피로 흥건한 무대에서 온몸이 젖은 채로 휴마윤과 바불이 깨어난다. 어떤 이유에선지 휴마윤은 앞이 보이지 않고, 바불은 손에서 칼자루를 놓지 못한다. 이후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데, 이들은 결국 건축가와 노동자 2만 명의 양손을 베도록 명령받았고 이를 실제로 행했던 것이다. 바불이 손을 자르면 휴마윤이 인두로 단면을 봉합했다. 바불은 이미 벌어진 현실을 부정하기도 하고 자신이 아름다움을 죽였다고도 말하며 쉽사리 충격과 죄책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지만, 휴마윤은 명령에 따른 것일 뿐이라고 주장하며 이미 벌어진 일에 연연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참을 실랑이하던 이들은 결국 다시 복장을 갖추고 근위병의 업무로 복귀한다.
다음 장면에서 이들은 다시 경비를 서고 있으며, 휴마윤은 자신들이 맡은 임무를 훌륭히 해냈기에 황제를 직속으로 모실 수 있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면서 바불과 함께 기쁨을 나누려 한다. 하지만 아직도 죄책감에 사로잡힌 바불은 휴마윤에게 같이 황제를 죽이자고 제안한다. 하지만 휴마윤은 바불을 비교적 죄목이 작은 신성모독으로 체포하여 넘기고, 이후 무대는 암전 후에 바불이 사슬로 묶여있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바불을 찾아온 휴마윤은 그에게 충격적인 진실을 털어놓는다. 군의 높은 위치에 있던 휴마윤의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발각당한 그는 바불이 실제로 했던 황제에 대한 모함을 실토해 버렸고, 그를 살려달라고 아버지에게 빈 결과 휴마윤 자신이 바불의 손을 자르면 그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는 일종의 거래를 한 뒤에 그는 바불이 갇혀있는 장소로 찾아온 것이었다. 절규하는 바불은 그를 말리는 동시에 자신의 손을 자르고 나면 휴마윤이 미쳐버릴 것이라며 그를 걱정하기도 했지만 결국 휴마윤에게 손을 잘리고 만다. 이후 근위병 근무로 돌아온 휴마윤의 모습으로 장면이 전환된다. 바불과 함께 정글에서 살아남았던 과거를 떠올리는 휴마윤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작품은 막을 내린다.
대부분의 작품에는 관객 혹은 독자가 자신의 시점을 투영하여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인물이 존재한다. 이는 선역, 악역, 혹은 가련한 인물이 될 수도 있으며, 창작자는 본인의 의도에 적합하게 작품 속 세계에 몰입할 수 있도록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그러나 본 작품은 관객의 시야를 의도를 가지고 둘로 나누었다. 서로 상반되지만 어느 한쪽이 자명하게 우월하지 않은 휴마윤과 바불의 대담은 관객이 어느 한쪽을 쉽사리 선택할 수 없도록 하였고, 이 구조적 모호함은 작품 속 등장하는 딜레마의 효과를 배가시켰다. 그릇된 명령을 지시한 황제와 이를 실제로 행한 근위병이 짊어지는 죄의 무게는 다른지, 노동자 이만 명의 손과 황제 목숨의 무게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지, 목도한 절망을 차치하고서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휴마윤과 굴레를 끊기 위해 또 다른 비극을 저지르는 것을 선택했던 바불 중 어느 쪽이 합당한 지에 대한 심리적 갈등인 딜레마는 물질세계에 빚어진 딜레마의 화신 휴마윤과 바불을 통해 강조되었다.
두 근위병의 상반된 견해를 강조하기 위한 상반된 묘사가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2만 명의 손목을 자른 후에 휴마윤은 일시적으로 눈이 보이지 않았고, 바불은 손에 쥐가 나서 칼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이는 비극을 애써 외면하고 눈을 돌린 휴마윤과 황제를 죽이고 비극을 끊어내려던 바불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그 외에도 하늘과 우주를 향한 발명품을 꿈꾸던 바불과 운송용 구멍, 궁 안으로의 입성을 꿈꾸던 휴마윤의 꿈은 각각 발산과 수렴의 방향성을 나타냈다. 세상을 향해 발산하던 바불은 결국 폭발해 버렸고, 안으로 수렴하던 휴마윤의 속은 곪아버렸다.
이 모든 비극이 타지마할의 아름다움으로부터 기인했다는 사실이 감정의 낙차를 배가시켰다. 그리고 이는 역설적으로 타지마할이라는 (작중) 미지의 공간의 아름다움을 다시 강조하기도 한다. 아름다움과 비극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끌어올리는 기이한 형국이었다. 작품에서 타지마할의 실제 모습을 실루엣이라도 보여주지 않은 선택이 효과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배우분들의 연기도 출중했고, 바닥에 깔린 물이나 무대 천장과 객석 위에서 뿌려지는 안개 등 무대장치도 참신했다. 대화 위주로 전개되는 작품에 거부감이 없다면 관람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