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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렁 Mar 03. 2022

[영화 감상문] 조커, 토드 필립스

가면과 얼굴이 뒤바뀐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가면은 그 사람의 정체를 숨기고 진실을 알 수 없도록 하는 장치가 된다. 강도는 가면이나 두건을 쓰고 범죄를 저지르며, 배트맨은 가면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숨긴다. 작중 토마스 웨인은 광대들을 가면을 쓴 겁쟁이로 표현한다. 위와 같은 일반적인 사고에서는 웨인의 말이 옳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가 간과한 것은 고담이라는 도시가 생각보다 더 미쳐있는 도시라는 점이었다. 그들의 광대 가면은 그들이 지닌 본성이었으며, 가면을 벗은 상태에서의 그들이야말로 진정으로 거짓된 모습이었다.

그들은 가면을 벗고 있을 때 거짓되었고, 가면을 쓰고 나서야 광기 어린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안은 밖이요, 밖은 안이었던 것이다. 이런 그들을 깨운 경종이요 신호탄이 바로 아서 플렉, 조커였다. 그는 고담에 광기를 마치 역병과 같이 퍼뜨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역병과는 다르다. 그는 단순히 그들의 광기가 잠들어있는 방에 노크를 한 것뿐이지, 그 자체가 광기의 숙주인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광기를 표출하기 위해 광대 마스크를 썼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들의 본래 얼굴, 광기를 가려주던 본래의 가짜 얼굴이 벗겨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시초가 된 아서의 광기를 깨운 것 또한 아이러니하게도 광기 어린 세상이었다.


하지만 아서의 광기는 확실히 시민들의 그것과는 달랐다. 아서는 미쳤다와 미치지 않았다는 경계조차 모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광대 마스크를 쓰지만 아서는 자신의 얼굴 위에 직접 광대 분장을 그린다. 이는 단적으로 그와 광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임을 방증하며, 작품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피로 입꼬리를 그리는 그의 모습이 이를 완성한다.


그의 일상생활 또한 경계가 명확하지 못하다. 일상생활 중에 갑자기 박장대소하는 아서를 보며 형사는 그것이 광대짓이냐고 묻는다. 그의 일상과 광대 일의 경계는 모호하다. 그의 출신도 모호하다. 그는 웨인가의 아들일 수도 있으며, 정신병 걸린 가정부의 아들일 수도 있다(물론 여기까지 온다면 그의 출신 자체는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는 출신이 모호하다. 이 표현이면 충분하다).


그가 저지르는 살인과 일상 사이에도 경계가 모호하다. 그는 옛 동료를 친절하게 맞이하며 그다음에 한 동료를 죽이고, 다른 한 명의 동료를 위해서는 문까지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머레이를 죽일 때에도 그는 일말의 머뭇거림 없이 총을 겨누며, 그를 죽인 후에는 다시 태연자약하게 자리에 앉는다.  그의 망상 또한 그의 모호함을 보여준다. TV쇼에 출현하는 망상, 옆집 여자와 사랑에 빠져 데이트하는 상상 등 일상에 녹아든 망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와 같이 그는 경계 자체가 모호하며, 함부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사람이다. 이것이 그가 가진 가장 무서운 점이다. 그는 미쳤다고, 미치지 않았다고 정의조차 내릴 수 없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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