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더 배트맨, 맷 리브스
본인의 개성을 잃어버린, 희망의 상징이 되어버린 배트맨
이 영화의 주연이 굳이 배트맨이어야 할 이유가 있었을까? 감독이 풀어내고 싶었던 메시지는 정해져 있었고, 배트맨은 단순히 소재로서 활용되고 소모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쓰다 보니 아쉬운 부분들만 너무 나열된 것 같기도 하다)
러닝타임이 긴 데는 이유가 있었다. 히어로물을 바탕으로 추리, 퍼즐, 로맨스, 소외계층에 대한 인류애까지 감독이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이 영화 한 편의 분량 치고는 너무 방대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각 장르의 임팩트가 줄었다. 다회차 드라마로 나왔어도 괜찮았을 것 같다.
분량 문제와 연관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서사에 비약이 꽤 많았다. 다른 장르였다면 모르겠으나, 리들러를 악역으로 한 추리와 퍼즐이 주된 스토리였기에 이와 같은 빈약한 인과가 조금 아쉽게 느껴진다. 암호를 바로 풀어내는 전 정보부 소속의 집사 알프레드, 본인이 붙잡힌 상황에서 스페인어 문법 교정을 해주는 펭귄, 때마침 배트맨과 마주친 경찰의 가족이 카펫에 대해 잘 알았던 점 등 복선과 치밀한 설계보다는 쉽게 넘길 수 있는 건 쉽게 넘기자는 주의였던 것 같기도 하다.
계속 영화의 장르를 수수께끼와 연관 지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하지만, 리들러의 수수께끼가 임팩트가 크지는 않았다. 첫 번째 암호문은 워낙 널리 알려진 방식이다 보니 별다른 감흥은 없었으나, 두 번째 쥐와 감옥 힌트가 좀 빈약했다. 단순히 첫 번째 트릭을 루미놀 조명을 비춰야 보이게 숨겨놓기도 했었고, 쥐가 들어있던 감옥 구조도 예상외로 별다른 의미가 없었다. 단순히 '미로'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기만 했지 구조물 자체는 큰 역할이 없었다. URL로 인터넷 주소로 연결되는 것도 영화 "서치"에서 웹과 현실 연계를 통한 사례는 다양하게 보여준 내용들이 있어서 그렇게 새롭지는 않았다. 검사에게 내는 수수께끼들도 딱히 의미가 있었다기보다는 리들러가 수수께끼를 내야만 한다는 강박에 억지로 끼워 넣은 느낌이 있다. (그마저도 배트맨이 즉문 즉답하듯 맞춰버려서 정말 보여주기 식 수수께끼가 되어버렸다) 작품 내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엽서도 그 빈도에 비해서는 연결성이 부족했다.
서양 신파 물의 느낌도 지울 수 없었다. 아버지도 아니라고 말하는 브루스, 알프레드가 위험에 처하고 병원으로 실려가자 옆에서 간병하며 손을 맞잡고 이야기하는 두 사람, 잊을 법하면 등장하는 셀레나와의 로맨스 (거기에 생각보다 중간에 중요도가 떨어진 그녀의 친구 아니타), 재난 상황에서도 연설을 하려다 총에 맞는 시장 등 이야기의 큰 줄기와 벗어난 이야기들의 비중이 생각보다 높았다.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주연 캐릭터들의 매력과 일관성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이다. 배트맨은 그림자 속에서 암약하며, 어린 시절 부모님을 잃고 범죄에 대한 분노와 복수로 점철된 캐릭터성이 다른 히어로들과의 차이점이라고 생각한다. 전면에는 나서지 않고 사건의 이면에서 활약하는 것이 배트맨의 매력이지만, 해당 작품에서의 배트맨은 세상에 너무 공개되어 있다. 브루스 웨인의 정체만 숨겨져 있지, 사실상 경찰 측과 동행하며 수사한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의 행보를 보여준다. 작품 초반에 본인은 그림자라고 하지만, 매번 사건 현장에서 형사나 탐정 포지션으로 등장한다. 물론 다소 과격한 방식으로 마피아 아지트에 잠입하지만, 그 부분을 제외하고 보면 매우 강한 형사나 탐정 정도로 배트맨 포지션이 대체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을 정도인 것 같다. 마지막에는 홍수에 휩싸인 건물에서 횃불을 들고 사람들을 구출하고 인도하는, 메시아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마지막에는 복수를 포기하고 희망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기까지 한다. 개인적으로는 이 정도면 캐릭터성 붕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 사람도 구하고 생각도 바뀔 여지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이렇게까지 180도로 본인의 포지션을 바꾸면서까지 훈훈한 엔딩으로 끝낼 필요가 있었나 싶다. 어둠 속에서 묵묵히 사람을 구하고 어느새 홀연히 사라지는 자경단, 그리고 그런 그를 마음속으로 기리는 도움받은 사람들이 되었어야 했는데 막판에 배트맨은 거의 소방 구조대원처럼 함께 구호작업을 하고 환자를 헬기에 실어 보낸다. 캐릭터성이 일관되지 못하고 너무 양지로 나와버린 배트맨이 개인적으로는 가장 실망스러운 부분이었다.
리들러의 경우에도 전체 흐름을 위해 캐릭터성이 희생된 느낌이 있다. 감독의 의도는 확실했던 것 같다. 히스 레저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처럼, 리들러 자체의 공포보다는 혼돈의 사회에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자 사회에 울리는 경종 역할을 부여한 것 같다. 리들러는 어느 정도 그 역할은 해 주었으나, 본인의 작중 지명도는 높이지 못한 것 같다. 지금까지의 빌런들보다는 본인 자체가 지닌 임팩트가 약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너무도 목적성 있고 타당한 범죄 사유가 있었기 때문에 공감을 얻어서 인 것 같다. 사실상 빌런들은 부패한 사회와 고담시의 고위층들이었기 때문이다. 빌런보다는 내부고발자, 용기를 낸 소시민 포지션이어서 혼돈을 가져오는 빌런의 느낌이 조금 약했다. (물론 살인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다만 그 목적이 지나치게 타당한 것이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히스 레저나 호아킨 피닉스의 조커는 그 자체로 혼돈인 사람들이었다. 대업을 이뤄내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범죄가 아닌, 혼돈을 위한 혼돈이 그들을 그렇게까지 무섭고 기억에 남도록 할 수 있었다.
기억에 남을 만한 배트맨의 시그니쳐 소품이나 장치가 없었다. 배트카, 바이크, 슈트, 작살 등 소품들이 정석적이기는 했지만 wow 할 만한 아이템이 없었다. 그나마 렌즈 정도가 뽐내고 싶었던 아이템인 것 같은데, 2022년 치고는 약하다. 그리고 배트맨의 특성과도 큰 관계가 없고 심지어 셀레나도 사용하기에 그 희소성도 떨어진다.
작품 초반에 나오는 반만 조커 분장을 한 소년, 작품 마지막에 각자의 바이크로 함께 달리다가 갈림길에서 좌우로 갈라지는 배트맨과 셀레나 등 비교적 직시적인 연출이 많았다. 굉장히 정석적인 방식이지만, 너무 정형화된 클리셰가 많으면 흥미가 떨어지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