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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리다 Oct 04. 2024

회원님, 유아풀로 가세요.

저는 어엿한 성인이란 말입니다.





(지난 글의 마지막과 살짝 겹치며 시작)





  L과장과 눈이 마주치자 그의 시선은 곧바로 다른 곳을 향했다. 관심을 끄는 다른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서로를 응시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선택한 행동 같았다. 나도 그랬기에. 


  그는 조막만한 수영복을 달랑 하나만 걸치고 있어서 맨 몸이 나보다도 더 많이 드러났다. L 또한 수영장으로 나오며 많은 생각을 했을지도. 자기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왜 여직원에게 같이 다니자고 꼬셨는지 후회가 몰려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잠깐 이쪽으로 와서 앉아봐요.”


  수업 시작까지 몇 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수영장 한 켠으로 와보라고 그가 손짓했다. 가만히 서 있기 민망해 그런가 싶어 따라 걸었다. 6개의 레인이 있는 수영장과 별개로 작은 풀이 하나 있었다. 성인 무릎 혹은 허벅지 높이 까지만 올라오는 수심의 풀이었다. 이렇게 낮은 수영장은 어린아이들이 이용하는 유아 전용 풀인가 생각했다. 


“다리를 이런 식으로 차는 거예요, 빠르게.”


  L이 그 유아 풀 가장자리에 걸터앉아 나를 그 옆에 앉도록 하고는 물속에 다리를 넣어 발차는 것을 보여줬다. 엄지발가락을 앞으로 쭉 뻗어 발등과 정강이가 일직선이 되게 만든 다음, 무릎을 최대한 굽히지 않는 느낌으로 빠르게 파파파팟 차라고 예시를 보였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동작이었다. 그런데 이 적나라한 차림으로 나란히 앉아서 킥을 차고 그것을 또 봐주고 있자니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부끄러운 내 몸뚱이를 숨기고 싶어 서가 아니라 이번엔 다른 문제였다.


  남자 직원의 맨다리를 옆에서 초.근.접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이게 생각보다 상당히 민망했다. 다리털 하나하나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걸 내가 쳐다보고 있어도 되는 것인가 의문까지 들었다. 게다가 물을 세게 발로 차고 있으니 물이 튀길 때마다 고개가 돌려졌는데, 의도치 않게 내 시야에 들어오는 L의 짧은 수영복. 팬티와 다를 것 없이 작았던 그의 화려한 수영복에 내 눈과 머리는 혼란 그 자체였다. 지금 이 순간 선글라스가 절실했다. 


수업아 제발 시작해 다오.





‘삡-.’



  호각소리가 들리는 곳엔 이 수영장에서 가장 강렬한 모습을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오랜 운동으로 다져진 근육을 잔뜩 머금은 몸 위에 샛노란 형광색의 수영복을 입은 그 남자는 호각소리를 내며 체조를 시작했다. 수영장 물을 가운데 두고 모든 사람들이 물 밖에서 서 있었고, 서로의 간격을 넓게 벌린 후 익숙한 듯 체조 동작을 따라 했다. 체육복이 아닌 수영복을 입고 사람들 앞에서 체조하는 것이 아직은 쑥스러웠던 터라, 나는 커다란 기둥 뒤에 숨어 몸을 풀었다. 고요한 수영장 물 위로 리드미컬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 오신 분은 이리로 오세요.”


  함께 체조했던 그 많은 사람들이 각자 소속된 반의 레인으로 흩어졌다. 이 흩어짐은 수평으로 뻗어 나간 모양새가 아니라 순식간에 모두들 아래로, 물속으로 내려가는 모습이었는데, 그 광경이 마치 뜰채에 담긴 모래가 채의 구멍 아래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걸러져 자갈만 남은 듯이 어두운 색의 수영복을 입은 신규 회원만 열명 남짓 서 있었다.


  강렬한 형광색 수영복의 남자는 초급반 강사님이셨고, 단 몇 개의 질문을 꺼내어 처음 온 사람들의 노선을 정해주었다. 


“배영까지 할 줄 아시는 분?”


  처음 온 것 같지 않은 눈빛의 한 사람이 5번 레인으로 보내졌다. 5번과 6번 두 개의 레인이 초급반이라고 했는데 5번 레인이 초급 중에서도 ‘上’반인 듯했다.


“자유형 조금이라도 배운 적 있는 분?”


  두 명이 6번 레인으로 보내졌다. 5번 레인은 초상(上)급 반이고, 6번 레인은 초하(下)급 반이라는 소리인데, 레인은 6레인이 끝 아니던가. 나를 포함한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반인 건지 어느 레인으로 가야 하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그 순간 이어지는 강사님의 질문.


“그럼 나머지는 처음 배우시는 거죠?”


  나를 포함하여 일곱 명 정도 되던 사람들이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남은 분들은 저기 유아풀로 가세요.”





  지난주 수강신청을 완료한 이후로 막연하게 상상해 오던 모습이 있었다. 수영을 배운 다는 것이 이런 풍경 일 것 같았다. 발을 담그면 기분 좋게 차가울 것 같은 푸른빛의 평화로운 수영장, 붉은 로프가 쭉 뻗어 있는 레인 가운데 물의 부력으로 편안하게 떠 있는 내 몸과, 앞으로 나아가려 우아하게 젓는 팔. 그렇게 헤엄치는 내 옆에서 안전하게 영법을 알려주시는 살가운 강사님의 모습. 



  하지만 현실의 나는 0.7M 수심의 이 유아풀에서 뜨지도 못한 채 서 있었다.

  힘을 빼라는 강사님의 고함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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