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를 넘는 사람들
2004년 8월 어느 날, LA 공항의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온 나를, 낯선 베트남 사람들이 뛰어와 힘차게 끌어 안았다.
그중 몇몇 중년 여인은 울음을 터뜨렸고, 그들과 함께 온 아이들과 젊은이들이 조금은 놀란 얼굴로 그런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20년 전, 남중국해에서 표류하던 96명의 보트 피플 중 일부이고, 그들의 자식들이었다. 나만큼 나이 먹은 한 여인이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우리를 살린 선장님,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19년 만이네요, 19년”
그 때의 장면이 뿌옇게 피어 난다.
그 바다 위, 25 척의 원양어선은 SOS를 외치는 콩나물 시루처럼 사람들로 빽빽한 조그마한 목선을 외면했고, 인도양에서 1년 만에 돌아가는 우리 선박도 처음에는 '관여치 마라'는 회사의 지침에 따라 그냥 지나쳤다.
비틀거리는 침몰 일보 직전의 그 작은 목선에는 어린 아이들과 굶주린 임산부도 여럿 있었다.
작은 배가 더 작아져 무심한 한 점이 될 즈음, 나는 일생을 두고 후회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모든 책임은 선장인 내가 지기로 하고 배를 돌렸다.
언젠가 내 아버지로부터 레오나르 라뤼 선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1950년, 흥남에서 59명이 정원인 상선에 1만 4천명의 피란민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달렸던 그 용기 있는 미국인 선장.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린 그 소박하고도 용감한 마음이 떠 올랐다.
그 때 그의 용기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그 선장처럼, 나도 배를 돌렸다. 비록 회사는 반대했지만 말이다.
우리 선원들은 96명의 베트남 난민들과 함께 식량과 쉴 곳을 나누었고 열흘이 지나 부산에 들어왔다.
부산에 돌아온 즉시 나는 해고통지를 받았고 선원들과 함께 정부기관에 불려가 몇 달 동안 조사를 받았다.
96명의 난민들은 미국, 캐나다, 호주 등으로 분산되어 나름대로 정착해 살았다.
실직한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불러 주지 않았다. 친했던 사람들도 나를 피하려고 했다.
애처로움과 원망이 섞인 아내의 시선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배를 돌리던 그 때 어쩌면 이 행동 하나가 나의 많은 것을 바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내 미래와 선장으로의 경력이 끊어질 수도 있다는 각오를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고향인 통영으로 돌아와 멍게 양식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그렇게 살아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그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서 그렇게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그들 96명이 나를 기억해주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이미, 그 때 너무나 소중한 것을 얻었으니까.
평생에 걸쳐 나는 생각해 오고 있다.
내 생에 가장 가치 있는 일은 그들을 배에 태워, 데리고 온 일이었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