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80년대 어느 초겨울, 어둠이 카바레 내부에 온전히 내려 앉았다. 연회색 조명이 머리 위에 드리워지면서, 은은한 스포트라이트가 무대위 한 여자를 비추고 있었다. 옥련이다. 맨발이었다. 다소 낡은 진홍색 벨벳 드레스가 늘씬하면서도 풍만한 온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카락은 묶어 올렸고, 한쪽 귀에 걸린 작은 은빛 귀걸이가 반짝거렸다. 촉촉한 두 눈도 함께 반짝거린다. 잔잔한 피아노 선율이 천천히 허공에 있는 계단을 오르는 듯 흘러 퍼졌다.
저 달이 하늘을 버릴 때까지
저 바다가 모두 마를 때까지
내가 당신을 존경하는 한,
저 작열하는 태양이 식어버릴 때까지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내사랑, 그대를 사랑합니다.
톰 존스의 영원한 사랑을 갈구하는 노래 'Till'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는, 낮은 음색이었지만 묘하게 따뜻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깊고 소금기 머금은 목소리는 삶의 페이소스를 맛 본 사람들의 것이다. 그녀는 단어 하나하나에 온갖 정성을 담았다. 홀 안의 모든 사람들은 그 목소리 끝에 걸려 있는 간절한 호소에 사로잡힌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춤추는 사람들은 음악에 몸을 맡겼다.
조명이 살짝 흐릿해졌고, 옥련의 실루엣만이 또렷이 남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깊어졌고, 애절하면서도 깊은 울림이 홀 전체로 퍼졌다.
용식의 트럼펫이 간주로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이런 얘기를 하려는 듯 천천히 공중으로 깊고 부드럽게 퍼졌다.
살아 가면서 진정으로 사랑할 누군가를 만나는 사람은 운이 좋은 거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위하여 자신을 태울 수 있는 사람은 더욱 운이 좋은 거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년의 여자는 며칠째 이 곡을 카바레 밴드에 리퀘스트했다. 눈가에 잔 주름이 폈지만 깨끗하고 하얀 피부를 가진 그녀는 누구와도 춤추지 않으면서 이 곡을 며칠 째 신청하고 있다. 웨이터는 며칠 전에 함께 온 젊은 제비족 청년을 기다리는 거 같다고 했다.
키 160센티 정도로 짧은 키의 용식은 머리까지 거의 빡빡 깎은 수준이라 옥련과 나란히 서면 영 작아 보인다. 크고 야무지게 각진 머리에 배가 튀어 나온 그는 짙은 고동색 연미복 차림으로 연주를 자주 했는데 사람들은 간혹 럭비공같다고 얘기하곤 했다.
노래는 이어졌고 열정을 다한 마지막 소절이 끝난 후, 옥련의 숨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퍼졌다.
잠시, 아주 잠깐의 정적.
한 남자가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탁. 탁. 탁.
이어 와하는 함성과 함께 춤추던 사람들이 박수를 쳤다. 누군가는 술을 한 모금했고, 누군가는 고개를 떨구었고 누군가는 눈물을 닦았다.
'박수 쳐!' 맨 앞에 앉은 뚱뚱한 남자가 격앙된 표정으로 외쳤다.
용식은 무대 옆에서 옥련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깊이 생각하는 고개 숙인 옆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용식에게 옥련은 언제보아도 시원하게 잘 생겼고 매력적이었다.
여기 대구 수성구에 있는 카바레 '블루스타'의 캄보밴드는 보컬과 알토 색소폰, 트럼펫을 포함하여 모두 여섯 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밴드 마스터겸 색소포니스트는 용식의 해군 군악대 동기다. 그는 계명대 음대에서 오보에를 전공했고 졸업 후 대구 시립교향악단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떨어 졌다. 그는 군악대에서 만난 용식의 재능을 아까워 했으며, 용식이 음대를 다녔으면 시향쯤은 눈 감고 들어갔을 거라고 자주 말했다. 그들은 장계현과 템페스트의 '나의 20년'에 이어 몇 개의 뽕짝을 엮어서 만든 지르박 메들리와 김정호의 '고독한 여자의 미소는 슬퍼', 나가부치 쯔요시의 'Hold Your Last Chance'와 같은 블루스 곡들로 1부를 마쳤다.
영호가 한 무리의 동료들과 함께 와 있었다. 영호는 두어달 전에 자신이 다니는 무역회사의 회식 2차 길에 동료들과 함께 블루스타에 처음 왔다. 집이 근처에 있다며 그 이후에도 가끔씩 혼자 와서 옥련이 노래하는 모습을 한동안 보고 갔다. '와이프랑 같이 오세요'라는 옥련의 말에 그는 아내가 바람 피워 최근에 이혼했고 국민학교 다니는 아들 하나와 같이 산다고 했다. 영호는 노래 잘 들었다고 옥련에게 팁을 몇 번 주고 간 적이 있었다. 옥련은 그 팁으로 밴드 멤버들과 포장마차에서 야식을 사 먹고 교통비에 썼다. 용식도 영호의 밝고 선량한 인상이 좋았다. 영호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친절했고 무엇보다도 팝송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많아 용식과 곧잘 대화했다.
1부 무대를 마치고 지나가는 용식에게 영호가 말했다.
'잘 들었어요. 형! 언제 Wham의 Wake Me Up Before You Go-Go와 같은 곡도 한번 해줘요. 요즘 최고 뜨는 곡인데 들어보면 지르박이거든요, 가사에도 그렇게 나와 있고,.. 예?'
2부 중간에 용식의 독주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의 독주에 맞춰 블루스를 춘다. 용식의 트럼펫 소리에는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음색이 별로 없다. 사람들이 블루스 추는데 뾰족한 소리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매일같이 텅잉을 최소화하는 훈련을 한 결과다. 용식이 부는 트렘펫 블루스는 끊어짐 없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레가토의 부드러움 속에 은은한 울림이 공중에 스며들었다. 노래가 거의 끝나갈 무렵 용식은 혀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 소리를 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알아 차리지 못했고 연주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 듯 했다. 용식은 입 근육이 굉장히 뻑뻑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공연을 모두 마쳤을 때 다른 무리는 모두 빠지고 영호 하나만 남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형네 밴드는 2악장이 아이네. 1악장이네요.' 다가오는 용식을 보고 영호가 말했다.
당시 유흥가에서는 1악장 악사는 호텔 나이트클럽 전속 밴드, 2악장은 회관과 카바레, 3악장으로는 요정과 룸살롱 연주자로 분류하였다.
'음악에 1급, 2급이 어딨노? 음악이면 다 같은 음악이지.' 용식이 대꾸했다.
영호가 말을 이었다.
'근데, 요즘 전자올갠이 많이 뜨는 모양이대요. 저 어디고 향촌동에 있는 맥주집 '궁전'에서는 옛날부터 한 사람의 올갠 주자가 혼자서 다 해먹더만 인제는 웬만한데서는 다 그렇다카데요.'
'그래 말이다. 올갠 성능이 많이 좋아 졌더라. 옛날에는 소리도 선찮고 치기도 힘들었는데,.. 인자 난 뭐 먹고 살면 되겠노?'
'왔나요? 잘 지냈어요?' 옥련이 정리하고 나오면서 말을 끊었다.
세 사람은 카바레 앞 포장마차에서 우동과 소주를 먹었다.
영호는 대구에서도 이제 전속밴드의 시절이 지고 있고, 전자오르간 한대만 갖고도 모든 종류의 노래를 반주해주는 성인나이트식 회관이 뜨고 있다고 정리했다. 그리고 대구식의 회관이 부산을 포함하여 전국으로 퍼지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서 하면 아무래도 풍성하고도 정교한 연주는 안 되겠지만, 뭐 술집에 음악 들으러 온 것도 아니고, 업주들도 어리버리하다간 쪽박차기 십상이니까, 발 빠르게 맞춰 갈 수 밖에 없겠죠'
얘기 도중 영호는 옥련의 왼쪽 팔목 부근에 깊게 베인 상처를 보았다.
'이건 우예다가 생긴거라예?'
옥련은 어릴 적에 험하게 논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영호가 택시타고 가라고 지폐를 꺼내 용식에게 건넸다.
2.
몇 달이 지나 대구에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7월 어느 날 용식은 그날따라 아침부터 왠지 찜찜했다
카바레 블루스타의 전속 밴드 멤버는 몇 달새 대폭 축소되어 이제 옥련과 용식뿐이다. 용식은 트럼펫 독주와 옥련의 반주를 번갈아하며, 서툴지만 올갠도 연주한다.
용식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리고 부드럽게 트럼펫을 불었지만 카바레를 찾는 손님의 수는 점점 감소했다. 카바레 사장과는 막역한 사이라서 당장 붙어 있기는 하겠지만 용식의 마음은 불안하기만 하다.
수입이 기울어 가고 있지만 그는 음악을 두고 다른 일을 한다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언제라도 음악을 부르고 싶고 듣고 싶고 느끼고 싶다.
며칠 전 고향 후배에게 부탁하여 아르바이트 일을 하나 구했다. 사채업자의 돈을 시장상인들로부터 받아오는 일이었다. 그는 그 일을 얼마간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주지 못하는 사람들을 윽박지르지 못해 그 일을 그만 둘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수금재이는 못 한다.'
그는 얼마 전에 건물 철거하는 일도 며칠 동안 한 적이 있었는데, 기름이 흘러 내린 장판위에서 미끄러져 그만뒀다. 허리는 며칠 째 쑤시고 있다.
영호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카바레에 왔다. 옥련이 노래 할때면 그녀의 소리와 동작에 아주 집중하는 것 같았다. 영호가 옥련을 좋아하고 있다고 용식은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옥련은 6살짜리 딸을 둔 38살 먹은 이혼녀다. 5년 전에 자궁암 수술을 받은 그녀는 용식과 가장 친했던 고향친구의 3살 위 누나다. 용식과는 같은 동네에 살았던 고향 이웃이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용식과 친구들은 인근 동네에 사는 제 또래들과 냇가에서 패싸움을 한 적이 있었다. 좁아 터진 촌에서 철도 모르고 한참 나댔을 때였다. 보름이 며칠 지나 다소 어둑해진 밤에 각각 열 명 정도의 아이들이 야구배트와 쇠파이프를 들고 서로 마주 보며 욕을 해대다가 어느 순간 몽둥이를 휘두르며 서로에게 달려 들었다. 덩치가 커 상대방의 공격대상이었던 용식의 친구는 어딘가에 머리를 두 대 맞고 쓰러졌다. 병원에 입원한 그는 말만 어눌하게 할 수 있을 뿐 반신불수가 되었다. 상심이 너무 컸던 친구는 3개월쯤 지난 어느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용식은 친구의 누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 했으나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남동생의 죽음을 슬퍼하는 옥련에게 너무 미안했던 용식은 자신이 크면 그녀를 지켜 주겠다고 결심했었다. 용식은 최근에 우연히 자신의 생명보험증서를 발견했고, 수익자를 옥련으로 바꾸었다. 고향의 성인회관에서 노래를 불렀던 옥련은 동네 건달형과 동거했고 딸을 낳았다. 그녀의 남자는 조직폭력에 연루되어 안동교도소로 갔고 옥련은 아픈 딸을 데리고 대구로 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해군 군악대에 들어간 용식은 군악대 선배들로부터 트럼펫 연주에 필요한 음악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었고 지미 헨드릭스가 자신의 군대생활에서 그랬던 것처럼 거의 모든 남는 시간 동안 트럼펫을 연습했다. 제대 후 군악대 동료의 소개로 현재의 카바레에서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을 대구로 부른 군악대 동기에게 옥련을 얘기했고 그들은 한솥밭을 먹게 되었다.
용식은 영호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영호는 공부를 많이 했는 것처럼 보였다. 아는 것이 많았고 외국인과의 대화도 유창하게 했으며, 회사도 탄탄하고 월급도 적지 않아 보였다. 영호는 용식이 모르는 음악도 많이 알았다. 재즈나 블루스는 그렇다 치더라도 트럼펫 연주곡에 대해서도 자기만큼 아는 듯 했다. 그러면서도 고작 한 두 살 차이밖에 안 날텐데 꼬박 꼬박 형 대접을 해주고, 의견이 서로 상충될 때면 자기 주장을 하지 않는 점은 특히 용식의 마음에 들었다. 어느 날 영호로부터 자신의 부모 모두가 의사이고 음악을 굉장히 좋아해서 어릴 적부터 클래식이든 대중음악이든 아주 가까이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용식의 아버지는 거의 매일 술에 취해 첩인 용식의 어머니를 때렸고, 어머니는 중풍으로 몇 년 누워 있다가 작년에 고향에서 돌아가셨다. 세상은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겠지만 차별이 많다고 용식은 생각했다.
최근에 카바레에서 돈을 뜯어가는 수금원이 바뀌었다. 그는 자신을 대구 동남부를 관리하는 수성로파의 멤버라고 했다. 며칠 전 새벽 1시쯤, 두 명의 똘마니들과 함께 온 그는 담배 연기를 지배인의 얼굴에 뿜으며 사장에게 전하라고 보호비 인상을 요구했다. 다음 날 카바레 사장이 지배인에게 물었다.
'글마 지가 뭐라 카더노. 무슨 칼?'
지나가던 용식이 대꾸했다.
'칼은 뭔 칼인고? 수금재이지.'
이 일대 보스의 처남인 수금재이는 관할 구역내 유흥업소의 보호비 명목 액수를 5% 상향조정했고 자신의 약값과 노름비에 보탰다.
(Part2로 계속됩니다.)
아래 링크에서 트럼펫 연주곡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