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4년이 지났어. 지금 생각하면 얼굴이 확 달아오를만큼 창피스러운 적도 많지만, 그때 그때 잘 견디며 나름 마무리도 하고 열심히 살아낸 것 같은데, 남은 거라곤 퀭한 눈, 구부정한 허리, 동굴같이 낮아진 목소리뿐이야'
1983년, 비 내리는 9월의 맨해튼, 거리는 오가는 이 없이 차갑고 을씨년스러웠다.
첼시호텔 412호의 레너드 코헨은 나즈막하게 켜진 흑백TV 불빛 너머 거리를 바라보며 몇 병의 와인을 비우고 있었다.
'글쓰는 것보다는 나을 지 알았지만 벌이도 시원찮고 해내기가 녹록치 않은 것은 똑같아. 그런 노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무슨 노래를 들려줄 수가 있겠어.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야. 난 커다란 눈사태에 갇혀 버리고 말았어. 누군가 날 여기서 빼내 줘야 해. 하지만 별 볼 일없는 리투아니아계 유태인에게 누가 관심을 갖겠어.'
그는 심혈을 기울인 6집 앨범 'Recent Songs'에 'The Traitor'같은 좋은 곡이 있었는데, 안목없는 대중들이 몰라본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세상이 자신에게 등을 돌렸다고 여겼고, 어느덧 자신이 우울에 잡아 먹힐 단계에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요즘 들어서는 우울하던 중 갑자기 뭔가 희망적이고 밝은 기운이 뼛속 깊은 곳에서부터 꿈틀거리며 솟아나는 느낌이 간혹 있었다. 그 느낌은 감격스러웠으며 이유없이 북받쳐 울기도 하였다. 그런 좋았다 나빴다하는 감정의 주기가 갈수록 짧아졌고, 감정의 깊이는 심해졌다.
어쨌든 시원찮은 전작 이후 4년이 지나도록 다음 앨범은 윤곽 조차 잡히지 않았다.
'벌써 4년이 지나 버렸어. 이제 몇 안 되는 팬들마저 날 잊었겠지!'
그는 삼십이 넘어 자신이 만든 곡들을 가지고 레코드 회사를 찾아 다녔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번번이 거절 당했다. 포크 가수 주디 콜린스가 자신이 만든 'Suzanne'을 불러 주어, 운좋게 가수 생활을 시작했다. 어렵게 시작한 첫 앨범 이후 15년이 지나도록 대중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스스로 몇 번이고 생각해봐도 솔직히 보컬과 기타연주 뭐 하나 내세울 게 없었다. 굳이 있다면 노래말을 특별하게 만드는 재능일 지도 모를 재능뿐,
'리투아니아계 유태인! 유태인들, 다들 지가 가장 양심적이면서도 최고로 명석하다고 믿고 있지. 그러면서 서로들 못 잡아 먹어서 난리들이지. 사기치고 이용하고 팔아먹고, 유태인스럽다는 거는 무슨 헛소리야. 자기를 위해 목숨을 건 남자의 아내를 범하는 왕이시여, 당신은 모자란 것인가요, 시망스러운 게요? 당신이 만들었다는 그 노래들은 대체 알고나 한 것이오? 창피한 줄 알아야지, 수 천년 동안 형제간 싸움하고, 강탈하고 살인하고, 약자들에게 강하고 강한 자들에게는 한없이 약한 자들, 관심 없어. 피곤해.'
그의 총구는 자기 민족을 넘어 그 민족이 믿는 신을 향했다.
'피곤으로 가득찬 여정을 이끌어 온 양반, 게다가 질투심으로 가득한, 무책임하고 비겁하고 흉포하기까지 한 그런 신은 이 세상 일에 관여해서는 안돼. 신을 찬양하라고? 젠장맞을 할렐루야'
그의 신을 향한 원망은 이어졌다.
'만일 당신이 사람의 일에 간섭한다면 나는 당신을 쫓아내기 위해 죽을 때까지 싸울 것이오. 당신은 이 세상이 좀 더 어두워지기를 원하는 거 같으니 말이야. 사람들은 살아 보려고 이렇게도 애쓰는데 대체 당신이 우리에게 원하는 게 뭐요. 이미 오래 전에 우리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거요? 그래서 본 때를 보여 주려는 건가요?'
몇 해 전 불교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코헨은 불교의 구루 몇 사람을 존경하게 되었다. 특히 그는 구마라집의 삶과 말에 공명하였다.
'자신을 파계하려는 여인의 가족을 위해 스스로를 파계한 남자, 현재의 삶이 도량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제대로 한 말인 거 같아. 지금 이 세상이 지옥이야.'
싸늘한 빗줄기는 더 굵어지고 있다. 그는 병째 와인을 삼켰다.
자신이 사랑했던 몇 몇 여자들을 떠올렸다.
코헨은 그리스의 히드라 섬에서 매리앤 이헬렌을 만나 시와 소설을 쓰며 소박한 생활을 했다. 어느 날, 매리앤은 한 무리의 철새들이 하얀 종이위에 흩뿌려진 먹물처럼 파란 하늘을 날다가, 섬을 횡단하는 고압선 위에 줄지어 앉는 것을 보고 코헨을 불렀다.
'코헨, 이리와서 좀 봐. 전기줄 위에 새들이 있어.'
노래로 만들면 좋겠다는 이헬렌의 말에 코헨은 며칠 지나 '전선위의 새'를 불러 주었다.
전선 위의 새처럼,
한 밤중에 노래하는 술 취한 사람들처럼,
나도 자유롭고 싶어 나름 노력했다네.
코헨은 너무 여린 갈대였다. 세상의 잡다한 바람에 민감하게 휘청거렸다.
히드라 섬에 있은지 3년쯤 지나자마자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매리앤마저도 지겨워졌다. 그는 말수가 줄었고 혼자 침울하게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소설이나 시집은 잘 팔리지 않아 보였다.
어느 날 그는 폐허가 된 어느 도시를 걷는 꿈을 꾸었다. 배우들이 노래하던 돌로 만들어진 원형극장은 흉물스럽게 허물어져 있고, 관중석에는 커다란 동상이 반 동강 난 채 쓰러져 있다.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여기서 뭐하고 있어? 그들이 얼마나 기다린 줄 아세요? 서두르세요.'
고개를 들어보니 까만 새들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희색빛 하늘을 날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코헨은, 자의든 타의든 방랑을 일삼았던 자신의 조상들처럼, 길을 나섰다. 여기 저기 다니다가 몬트리올에서 젊고 매력적인 무용수 수잔 베르달을 알았다. 그리고 얼마 뒤 남자 친구와 헤어져 혼자서 딸을 키우고 있던, 몬트리올 강가 수잔의 집을 자주 찾아가 촛불을 켜고 자스민 차와 만다린 오렌지를 함께 먹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쨌든 코헨은 수잔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그리하리라는 마음으로 '수잔이 그대를 이끄네'라는시를 지어 바쳤고 그 시에 멜로디를 입혀 불렀다. 그러나 결국 그는 거절당했다.
'난 그녀의 육체를 원했지만, 결국 거부당하고 말았지. 어쨌든 수잔의 완벽한 육체를 마음으로나마 만졌으니까. 그걸로 만족해'
코헨은 몬트리올을 곧 빠져 나왔다. 젊은 가수들이 우글거리는 맨해튼의 첼시호텔 주변을 어정거렸다. 밥 딜런, 앤디 워홀, 재니스 조플린, 존 바에즈를 만났고 함께 이야기하고 술을 마시고 어울렸다. 문학적 재능이 특출했던 밥은 코헨을 이해하려는 척 했고 여러 포크가수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 중 한 사람이었던 쥬디 콜린스는 코헨의 2집 시집을 읽고 찾아와서 얘기하던 중, 방안에 있는 기타로 코헨이 자랑하고 있던 노래를 자기 앞에서 불러 달라고 했다. 코헨은 '아, 부끄러워..'라며 쥬디에게 노래를 들려 주었다. 그는 플라토닉한 사랑이 노래에 흐르고 있다고 강조했다. 쥬디는 흥미로워했고 자신의 앨범에 수록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회가 되면 프랑스어로도 녹음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코헨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자신은 노래를 만들고 읊조리는 음유시인이 될 거라고 말했다. 오디세이아를 짓고 노래한 위대한 호메로스처럼 말이다.
섬으로 돌아온 코헨은 매리앤에게 뉴욕에 갈거라고 했다.
'이렇게는 안 되겠어. 이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아. 뉴욕으로 가야겠어. 이제는 때가 왔어. 마리앤'
뉴욕으로 돌아온 어느 날 첼시 호텔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재니스 조플린을 만났다.
늘 그랬듯이 뭔가에 취해 있던 재니스가 오늘밤엔 크리스 크로스토퍼슨을 기다린다고 했다. 코헨이 대답했다. '내가 그라오!'
재니스 조플린과 첼시호텔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하룻밤을 보낸 코헨은 '첼시 호텔 #2'를 지어 노래하며, 노래의 주인공이 재니스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부끄러워했고 용서를 빌었다.
'재니스와 함께 하루 밤보낸 걸 철부지 자랑마냥 온 동네에 나불거리고 다녔어. 부끄럽고도 죄스러운 일이야.'
그는 매리앤에게는 진심으로 고마움과 미안함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매리앤이 시작하게 한거야. 우울하지 마라고 기타를 치게 한 것도, 노래말에 멜로디를 붙이게 한 것도 모두 매리앤이 시작하게 한거야. 매리앤은 나를 꿈 꾸게 해 준 여자야. 언젠가는 좀 더 성숙한 모습으로 재회하고 싶어. 덕분에 잘 지냈다고 전하고 싶어.'
69년에 또 다른 수잔을 만났다. 19세 소녀 수잔 엘로드와는 10년간 사랑했고 아담과 로르카 두 자녀를 낳았다.
어느 인터뷰에서 코헨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많은 여자, 다양한 경험, 다양한 나라, 다양한 기후, 다양한 사랑을 원합니다. 인생은 다양한 경험을 해야하는 뷔페와 같습니다.'
밤이 깊도록 그 남자의 번민과 고뇌가 깃든 회상과 우울한 찌질함은 하염없이 이어졌다.
'어쩌면 여기서 끝장이 날 지도 몰라. 그러고 싶지 않은데 그런 상황까지 끌려 갈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워.'
2.
리투아니아에서 전화가 왔다. 사촌 누나였다.
'레너드, 엄마가 돌아가셨어. 마지막 날에 널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얘기하시더라. 이젠 소용없지만, 그래도 와 줄 수 있겠니.'
코헨의 기억에는 좀 작은 체구의 이모는 늘 당차게 말하고, 말한 것을 즉각 행동으로 옮기는 용감한 사람이었다. 우중충하고 다 죽어가는 분위기가 대세였던 외가에서 독보적으로 활기찬 성격이라서 코헨은 이모를 잘 따랐다.
갈 거라고 얘기했다. 집안 여자들이 생각났다.
'가여운 내 어머니'
다정한 노래와 피아노 연주를 종종 해 주었던 어머니는 평생 우울해 했지만, 임종시에는 큰 일을 마친 사람처럼 다행스러운 듯 편안한 표정이 얼굴에 가득 했다.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 그녀의 친정집이 있었고, 그녀는 십대시절까지 그곳에서 보내다가 캐나다로 건너 왔다.
리투아니아 대공국은 중세 시절 유태인들에 대한 종교적 박해와 차별이 비교적 적어 많은 수의 유태인들이 오래전부터 정착해 왔다. 14세기부터 정착한 유태인에게 세금 징수와 상업의 역할을 맡겨 하도록 했다. 유태인들이 그 방면에 특히 재능이 있어 맡겼는지,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는 일이라 맡겼는지는 확실치 않다. 훗날 강대해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유태인 자치 공동체인 케힐라를 인정해 주었고, 유대인들의 문화와 종교는 더욱 왕성하게 발전했다. 18세기 말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면서 유태인 거주구역이 정해졌으며 유태인 인구 밀집 지역이 생겨 나서, 20세기 초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는 북쪽의 예루살렘으로 불릴 만큼 유태인들이 많았다. 빌뉴스에는 전체 인구의 40%가 넘는 십만 명이유태인이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불과 0.1%만이 유태인이다.
전쟁 초기 폴란드에서 탈출한 유태인들이 더해져 15만명이 넘어간 리투아니아 유대인의 대부분은 나치와 현지 협력자들에 의해 숲과 요새에서 학살당했다. 코헨의 외가집은 오래전부터 유대인 계몽주의의 선봉에 섰던 과학자, 철학자 그리고 음악가 집안이었다. 그들 역시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낸시 고모는 어머니보다 몇 살 어렸다. 그녀는 코헨이 태어나기 몇 해 전에 욕실에서 산탄총으로 제 머리를 쏘아 즉사했다. 우울증에 시달렸던 어린 고모는 마이크를 만나 사랑을 나누었고 아들을 낳았다. 완고한 할아버지가 그 아일 몇 달 뒤 다른 집안에 입양시켰다. 울며 찾아 온 자신의 딸에게 할아버지가 소리쳤다. '남들이 뭐라고 하겠니?' 불쌍한 낸시 고모는 절박함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할 지 몰라 애만 태우다가 할아버지의 총으로 할아버지의 욕실에서 목숨을 끊었다. 코헨은 낸시 고모를 그리워하며 'Seems So Long Ago, Nancy'라는 곡을 만들어 2집 앨범에 수록하였고, 할 말은 딱히 없었지만 언젠가는 꼭 만나고 싶었던 낸시의 아들과 마이크를 만나기도 했다.
리투아니아에서 온 전화 한 통이 코헨의 우울한 반추에 쐐기를 박았다. 어쨌든 그는 밖으로 나와 걸었고 리투아니아로 향하는 비행기를 탔다.
네무나스강과 네리스강이 만나는 지점을 지나 얕으막한 언덕 위에 외가집이 있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희미한 안개 속 강가에는 안나 베르델과 자주 만났던 몬트리얼에서처럼 적지 않은 작은 배들이 느릿느릿 지나 다녔다. 사오십 미터 남짓의 비닐로 천장이 쳐진 여객선과 노를 젓는 소형 보트 몇 척이 보였다. 강 너머는 큰나무들이 빽빽한 숲을 이루고 있었다. 어릴 적 봤던 기억에서처럼 카우나스는 대체로 고요하고 엄숙했다.
장례를 마치고 외가집에 돌아온 코헨은 2층 방에서 낡은 흑백 사진을 발견했다. 그 사진에는 어느 들판에서 몇 쌍의 젊은 남녀가 춤을 추거나 춤을 추려고 하고 있었다. 희뿌연 태양 아래 안개가 얕게 깔린 들판 위에서 여자가 남자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자신들의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춤추는 무대를 보고 있었고 여자는 남자를 보고 있었다.
"사진 보고 있었네. 그 사람이 누굴까." 사촌 누나가 자스민차와 라벤더 꿀을 들고 오며 말했다.
"글쎄. 언제 적 사진이야?"
"1940년 이 아래 저수지 옆 들판에서 찍은 사진이야. 사진 속 남자는 내 오빠야. 루이스 오빠. 같이 있는 여자는 시누이 한나고. 한나는 국적이 독일이야. 재미있지, 이야기해 줄까?"
3.
사촌이 들려준 루이스 부부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그녀는 여기에 자신의 상상과 훗날 생존자들로부터 들은 관련 사실을 모두 뭉뚱 그려 녹여냈음을 전제하며 말했다.
"그러니 거의 사실이라고 믿어주면 좋겠어."
루이스 오빠는 이십대가 되자 집을 떠나 친구와 함께 폴란드 소스노비에츠로 가서 직물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1939년 비스와 강변을 여행하던 23살의 한나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보헤미안 태생의 독일 국적을 가진 한나는 자신의 할아버지까지는 유랑을 했으나 아버지 때부터는 독일에 정착했고 병역의무를 다한 후, 부부가 함께 옷을 재단하며 살았다. 한나 그녀 자신도 옷만드는 일을 했다. 루이스와 한나는 오월의 따스한 햇살 아래 카우나스 저수지 옆 넓은 들판으로 몇 명의 친구들과 소풍을 갔다. 빛바랜 사진은 그 때 찍은 것이었다.
루이스와 한나 사이에는 아들이 하나 있었지만 돐이 지나고 홍역으로 죽었다. 전쟁이 터졌다. 폴란드가 독일에 점령 당하자 독일군과 독일군에 협조하는 현지인들은 유태인을 색출하러 다녔고, 루이스와 한나는 숨어 있다가 폴란드를 탈출해 리투아니아 외가집으로 왔다. 이모는 아들 내외를 탈출시키고자 방법을 찾던 중, 당시 일본 영사였던 스기하라 치우네로부터 일본 통과 비자를 받으려고 일본 영사관 앞에서 며칠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웃 주민의 고발로 루이스 부부는 체포당했고 그들은 어느 시나고그로 끌려 갔다. 평소 자신들이 신을 경배하는 회당에는 이미 잡혀 온 유대인들로 북적거렸다.
"한나는 독일인이오. 그녀의 아버지는 독일을 위해 전쟁터에서 싸우기도 했소. 그녀는 여기 있으면 안 되오." 루이스가 독일군 장교에게 소리쳤다.
독일군은 루이스를 힐끔 보고는 한나에게 독일의 사는 곳과 부모와 할아버지의 이름을 독일어로 물었다.
"흠. 그래. 조상들은 집시같군. 집시는 유태인과 다를 바 없어. 열등한 족속이지."
끌려 온 사람들은 카우나스 게토로 이동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구분되었고 각각 샤워장으로 내 몰렸다. 샤워를 마친 후 던져진 포로복을 입고 명단을 등록하고 왼쪽 손목 안쪽에 여섯 자리의 숫자를 새겼다. 유태인은 팔꿈치의 빨간색 띠와 가슴에 달린 식별 마크로 구별되었고, 굶주림, 질병, 혹독한 추위와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여러 종류의 위험한 일에 강제 동원되었다.
1941년 여름부터 카우나스 게토의 유태인들은 '제9요새'로 끌려 가기 시작했다.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을 시작하면서 리투아니아를 점령했고, 유태인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은 그 직후부터 바로 일어났다. 카우나스의 제9요새와 빌뉴스의 파네리아이 숲은 유대인들의 처형 장소로 사용되었다. 십 만이 넘는 리투아니아의 유태인들은 리투아니아에서 처형되었다.
제9요새는 카우나스 북쪽에 있다. 전나무와 가문비나무가 빽빽한 이 숲은 한 낮에도 햇빛이 들지 않았다. 이 곳 제9요새에서 수 만의 리투아니아 유태인들은 폴란드인, 소련군 포로들과 함께 학살 당했고, 직경 30~40m의 커다란 구덩이에 무더기로 묻혔다.
루이스는 게토에서도 한나를 빼 주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번은 게슈타포 간부가 와서, 한나에게 귀국해서 국가를 위하여 일을 하라고 종용했지만 그녀는 말을 듣지 않았다.
"우연이든, 숙명이든, 누가 만든 판이든, 루이스와 난 유일한 한 사람으로 서로 만나 사랑한 것이고 또 끝까지 함께 있을 겁니다."
제9요새는 19세기 말 러시아 제국이 카우나스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한 요새중 하나이다. 요새는 구릉의 꼭대기에 있고 붉고 단단한 벽돌로 단단히 둘러쳐져 있다. 훗날 제9요새에서 노역했던 리투아니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기차를 타고 온 죄수들은 신원이 확인되는 즉시 수십명씩 몇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이동했다고 한다. 요새는 서늘하고 무거운 기운으로 가득했고 뭔지 모를 향긋한 향기를 풍겼다고 한다. 그룹으로 나누어진 그들은 지하벙커나 요새 아래의 새로 판 큰 구덩이로 밀려 들어갔고 군인들은 사람들의 머리위에서 총을 갈겼다. 어떤 날에는 요새의 한 가운데에서 죄수들로 구성된 현악중주단이 무겁고늘어지는 연주를 끝없이 했다. 학살이 끝난 구덩이에는 가솔린이 부어져 사람들을 태웠다. 미처 죽지 못한 사람들은 불태워져 죽었다. 그러는 중에도 연주는 계속되었다.
"레너드야, 그건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야. 사람이 그럴 수는 없지 않니." 사촌은 울며 코헨의 뺨을 비볐다. 코헨은 그녀를 안았다.
4.
어두운 방 한 구석에 오랫동안 웅크려 앉아 있었다. 유태인들이 너무나 찌질했고 또 가여웠다. 집시를 포함하여 모든 집없는 사람들, 내 편이 없는 사람들, 이런 저런 약자들에 대해 연민과 연대감이 쳐들어왔다.
강하거나 야비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는 세계의 작동방식을 인정해야만 했고, 자신은 그 안에서 한낱 던져진 미약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는 쓰고 싶은 글과 부르고 싶은 노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신에게는 소중한 것이었다.
내 여자와 아이들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나름대로 힘들게 하루하루를 꾸려가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과 타협하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험악한 세상에서 단 한 사람을 지키며 사는 것이야 말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진정하고도 유일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잃어버린 감성을 추스려 자신만의 색깔을 갖는스타일로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슬펐던 과거를 피하지 않고 대놓고 노래하고 또한 자신이 유대인임을 감추지 않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새로운 앨범에 들어갈 곡에 바이올린, 클라리넷,신디사이저를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감정과 표현을 강렬하게 살린 빠르고도 슬프면서 감성적인 클레즈머 스타일로 노래를 만들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이 공동체 속에서 이 곡으로 노래하고 춤추기를 소망했다.
'내 마음 속 야생동물은 가장 악하고 두려운 존재이다.
오직 나만이 다스릴 수 있다.
자기가 되어야 한다.
피하지 않는다.
유대인임을 부끄러워하거나 죄스러워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내 음악을 표현한다.
단조의 음악은 삼키면 깊은 곳에서 단맛을 낸다. 피하지 않고 슬픔을 노래하자.'
매리앤이 생각났다. 돌아가면 안부를 물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싫든 좋든 나 스스로를 믿고 사랑해야 한다. 어쨌든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다. 몇 백만년 살아온 조상들이 있지 않은가. 그들의 대부분은 견디어 왔고 어쩌면 언제나 나와 함께할 거니까,...'
이듬 해에 7집 앨범 Various Positions를 공개했다.
그가 고뇌하였고 사람들에게 들려주고자 했던 노래가 담겨 있었다.
사랑이 다할 때까지 나를 춤추게 해 줘요.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2016년 7월, 매리앤 이헬렌의 남편에게서 편지가 왔다.
"그녀가 자신의 마지막 상태를 전하라고 했답니다."
"나도 곧 당신 뒤를 따라갈 겁니다. 당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 닿을 만큼 가까이 있어요.영원한 사랑이여. 우리 저 길에서 만나요."코헨은 이렇게 답장을 썼다.
'당신이 손을 뻗기만 하면'이라는 대목에서 이헬렌은 남편에게 '한번 더!'를 외쳤고 실제로 팔을 들어 손을 뻗어 올렸다. 그녀가 눈을 감자, 가족들은 그녀의 노래 'So Long, Marianne'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