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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칼립투스 Sep 22. 2020

해피 엔딩은 없다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듯, 멸시는 소를 주저앉게도 한다.


직장과 함께 모든 걸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내가 잃은 건, 자신감뿐이었다는 걸. 그럼에도 선택은 명료했다. 윗사람한테 인정받고 커리어를 계속 쌓는 게 더 이상 내 선택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나니, 회사에서 날 몰아낼 때까지 만년 부장으로 근근이 눌러앉아있을 순 없었다. 마음속이 지옥이었다. 더 이상 출근할 회사가 없어졌음에도, 매일 잘근잘근 상사들에게 밟히던 기억이 쉽게 잊히지 않았다. 


처음 겪는 여러 감정과 감각들로 힘들었는데, 그중 가장 불가사의했던 건 울렁증이었다. 더 이상 중요한 자리도, 평가를 받을 일도 없어졌는데. 사소한 일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길 가다 지나가는 사람들 틈에서 숨이 막혔고, 긴 복도를 지나다 바닥이 내 머리로 돌진한 적도 있다. 하루 온종일 간신히 평온한 척하다 잠이 들면 이전 직장 상사들이 꿈에서까지 나를 쫓아와 괴롭혔다. 


불안증이 잦아들고 나니, 분노가 찾아왔다. 사소한 일로 걷잡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운전하다 내 앞을 칼치기해서 끼어드는 고급 외제차에, 코로나 시국에 이랬다 저랬다 하는 아이 등교 스케줄에, 어렵게 잡은 예약을 취소해야 하는 현실에 분노했다. 시간이 지나 다시 취직한 회사에선, 어느덧 아래 직원들 실수에 뚜껑이 열리곤 했다. 


어린 시절 나를 화나게 했던 것들이랑 달랐다. 사춘기 시절 해외에서 살며 겪은 인종차별, 사회 초년생 시절 회식에 따라가면 겪곤 했던 개념 없는 주사들의 브루스 타령, 결혼과 출산을 겪고 나니 끼리끼리 중요한 프로젝트들을 꿰차고 비중 있는 역할에서 나를 모두 빼버린 남자 동료들. 사회 불평등과 불의에 저항한다는 자부심이 있던 그때와 달리 지금 난, 그저 사소한 일에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쟁에서 밀려난 중년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심과, 내가 줄 수 있는 것 대신 남들로부터 받고자 했던 우러름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부끄러울 만큼, 주는 것 없이 받기만 하고 살아왔다. 


부자의 척도를 가진 것과 필요한 것 사이라고 했던가. 만약 그렇다면 행복의 척도는 기대와 현실 사이에 있을 것이다. 기대가 낮거나 현실을 기대에 끊임없이 잘 맞추거나. 한 달 운동을 쉬면 열심히 만든 근육이 모두 흐물흐물 없어지듯 기대를 낮추고 현실을 기대에 맞추어 개선시키는 노력을 멈추는 순간,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매일 난 뒤로 간다. 그래서 루틴이 중요한가 보다. 아침에 일어나서 명상, 운동, 그리고 아들과 눈 한번 제대로 마주치고 출근. 


명상, 운동, 아들과 눈 마주치고 하루를 보내기. 이렇게만 무한 반복해도 나빠지진 않는다. 아니, 조금씩 좋아질 거라 믿는다. 인생에 '그 이후로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다'는 건 없으므로. 매일이 내일을 향한 과정이고, 내일은 1년 후, 1년 후는 5년 후를 향한 과정이므로. 죽을 때까지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명상, 운동, 아들과 눈 마주치기를 무한 반복해야 한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 과정을, 즐거이 여겨야 한다. 어차피 해야 할 것들이므로. 매일 타인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나 자신에 대한 노력은 더 하는 것. 현실이 기대와 달라도 평온을 유지하는 것. 연습이 필요하고, 아마 죽는 날까지 매일 수련해야 할 일이다. 행복은 살다 어느 순간, 몇 월 며칠 몇 시에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내가 노력하는 만큼 가까이 당겨 오는 것이므로.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사는 건 어쩔 수 없이 죽음이 종착지인 여정이다. 죽는다는 건 세상이 나 없이 계속 돌아간다는 건데, 그 세상에 나를 위한 행복이 있을 리 없다. 그러니 무언가 마음속을 가득 채울 극강의 행복과 만족을 바라며 자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대신, 매일 조금씩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명상, 운동, 아들, 아니 가족. 출발은 여기서부터 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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