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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린 톨스토이 이야기

by 미스블루

나는 여자 고등학교 출신이다.

여자고등학교는 남학생이 없는 곳인 만큼, 여자아이들이 인기 있는 남학생에 온 신경이 가있는 대신 여자들만의 우정과 여자들만의 비밀스러움으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요상한 세계다.

내 마음대로 여자고등학교를 택해서 간 것은 아니지만 살면서 끊임없이 나오는 추억에.. 자다가도 웃으며 여자고등학교를 다닌 것이 나에게는 참 행운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다닌 여자 고등학교는 학교의 시설이 아주 탁월하게 좋은 곳이었다.

그 훌륭한 시설들 중에 압권은 도서관이었다.

단독으로 서 있는 도서관은 유럽의 잘츠부르크에 있다고 해도 믿을 것 같은 유럽식 건물에 담쟁이넝쿨이 늘어져 있는 정말 멋진 곳이었다.

학생들은 특별활동이라는 과목아래 일 년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생활과 같은 수업을 하나 골라 일주일에 한 번씩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두 시간 동안 도서관에서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는 독서반'의 선택을 안 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나는 몰랐다.

그 멋진 도서관에 마녀가 살고 있는 줄.....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독서지도 선생님은 한 번도 결혼을 하지 않는 독신녀로서 한번 걸리면 죽는다는 소문이 나 있는 그런 분이었다.

나는 독서반을 선택한 후 그 소문을 들었고 이제 와서 다른 반으로의 이전은 안 된다고 했다.

그렇게 두려워 떨며 나의 독서반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독서반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수많은 책들 중에 마음에 드는 책을 골라서 읽고 있으면 되는...

그러나 독서지도 선생님의 룰은 있었다.

반드시 나에게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유익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룰.

그렇게 생각보다 평범하고 괜찮은 나날들이 지나고 있었고 소문이 무성한 독서지도 선생님의 매서운 눈빛은 있었지만 우리를 죽일 것 같은 사건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른한 오후..

그날은 독서반의 활동이 있는 날이었다.

늘 피곤한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점심을 먹고 난 오후는 눈꺼풀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저절로 붙어버리는 그런 날들이지 않은가....

입시로 지쳐있던 나는 그날 이 책 저 책 다 귀찮않다.

도서관의 책장에 흥미를 잃고 죽 훑어보고 있는데 어린이 책 같은 것이 눈에 띄었다.

어릴 때 읽던 톨스토이의 '바보 이반'이었다.

어릴 때 그 책을 읽으며 악마와 이반의 힘겨루기가 너무 재밌어서 발을 동동 구르며 읽었던 생각이 났고 오늘은 휴식 삼아 '바보이반'이나 읽으며 시간을 보내자는 마음으로 그 책을 빼들고 책상으로 와서 앉았다.

악마가 아무리 못살게 굴어도 바보이반은 밭일을 멈추지 않으니 약이 잔뜩 오른 악마가 이번에는 이반이 먹는 맥주 안에다가 자신의 침을 퉤퉤 뱉어 배탈을 나게 만들었고, 배탈이 난 지경에도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밭을 가는 이반을 보며 혼자서 배를 잡고 웃고 있었다.

갑자기 독서지도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앞에서부터 차례대로 일어나서 자신이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큰소리로 말하며 책의 표지를 보여주라는 지시가 내렸다.

'잉? 이를 어쩐담...'

벌써 앞에서 세 번째 정도의 아이가 선생님께 혼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무슨 책이었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쓸데없는 책을 지금 여기서 왜 읽고 있느냐며 안 그래도 천장이 높은 유럽식 도서관의 천장은 선생님의 고래고래 지르는 소리로 내려앉을 것만 같았다.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책의 표지를 다시 한번 보았으나 그곳엔 어린이들을 위한 만화 같은 그림과 '바보이반'이라는 글씨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곳엔 붙잡을 수 있는 지푸라기라고는 한올도 없었다.

좀 있다가 내 차례가 오면 나는 '바보이반'이라는 소리를 입 밖으로 내야 하고 어린이 동화책의 만화 같은 표지를 선생님께 보여 드려야 하고 그러고 나면 오늘이 '죽는 날'이라는 것밖에 그 현실에서 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른 책을 가지러 가다가 걸리면 더욱 작살이 날것은 뻔한 일이었다.

시간은 어찌나 빠르게 지나가는지 드디어 내 차례가 다가왔고 나는 책상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얼굴의 표정은 '바보이반'을 읽으며 장난기 가득했던 얼굴에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한 태연함을 가득 담은 진지함과 문학소녀의 모드로 바꾸어 놓았다.

저는... 음.... 저는.. 그러니까... 오늘 제가 읽고 있었던 책은... 바로.. 톨.. 스.. 토.. 이.. 의.....

독서지도 선생님은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더니 흥분하기 시작하며 내 말을 가로채었다.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 정말 굉장한 책을 읽고 있구나!!!!!!

그때부터 침을 튀기며 톨스토이에 대해서 한바탕 연설을 늘어놓으신 뒤 나에게 책을 들어 보여주라는 말도 잊으신 채, 아직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목소리로 '다음!!! 을 외쳤다.

그렇게 그날, 나의 지금도 사랑하는 '바보이반'은 '톨스토이의 생애와 작품으로 탈바꿈되며 나는 독서지도 선생님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었고, 다음부터는 진짜 읽고 싶은 책 한 권과 독서지도 선생님이 좋아하실 것 같은 책 한 권을 들고 도서관에서 마음껏 좋아하는 책을 읽으며 일 년을 보냈다.

오늘은 서늘하고 아름다웠던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며 수만 가지 꿈을 꾸었던 열몇 살의 나를 만나며 혼자 또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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