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치약 하나 사면 삼 년을 쓴 ' 미순언니 ' 들 이야기

by 미스블루

꼬마 때가 생각나면 심심했던 시간들이 떠오른다.

그때는 늘상 심심했던 것 같다.

말이 별로 없었던 나는 그저 보고 있었다.

어른들.. 사촌 오빠들.. 엄마, 아빠, 장난이 너무 심한 우리 오빠.. 흐드러진 개나리꽃, 그리고 항상 같은 자리에서 구걸을 하던 노숙자 아줌마까지..

너무 보아서일까.. 한 번이라도 가보았던 장소는 그곳의 놓여있던 물건의 자리까지도 기억 속에 생생하게 살아있다.

집에는 항상 사람이 많았다.

시골에서 서울을 방문한 할아버지 할머니부터 옆집에 사는 고모네, 매일매일 찾아오는 방문객들까지..

늘 여러 사람으로 북적이는 집이니 만큼 나는 어른들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혼자서 마음껏 상상의 세계로 여행을 다녔다.

내게는 좋아하는 취미생활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이야기 듣기였다.

어른들마다 가지고 있는 이야기보따리가 모두 달랐고, 사람이 가득한 집안에서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쉬웠다.

이 방의 이 사람에게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안 들은 척 시피미를 뚝뗴고 저 방의 저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으며 그렇게 하루를 지냈다.

집안의 사람들은 꼬마가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없는 이야기도 지어서 들려주어 귀찮은 꼬마가 얼른 방에서 나가주기를 바랐겠지 싶다.^^

그중에서 가장 흥미롭고 짜릿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시골에서 올라와 옆집 고모댁에 살며 집안일을 봐주는 미순언니였다.

우리 집에 머물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서 듣는 이야기가 끝이 나면 나는 옆집으로 슬며시 건너갔다.

그날의 이야기에 정점을 찍을 미순언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시간은 늘 오후 3시쯤이었다.

오후 3시...

얼마나 졸리운 시간인가..

새벽부터 일어나 많은 식구들로 북적이는 고모집의 아침식사 차리기를 시작으로 오후 3시까지 미순언니는 허리 한번 못 펴봤을 것이다.

아침을 차리고 난 후 산더미 같은 설거지를 했을 테고, 점심식사가 돌아오기 전 빨래며 다른 집안일을 해치웠을 것이다.

식구들이 점심을 먹고 나면 또 한 번의 설거지를 맞이하고 커피와 과일도 깎고, 걸레로 마룻바닥도 훔쳐냈겠지..

그렇게 지쳤던 미순언니가 저녁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잠깐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옆집의 사촌 꼬마는 오늘도 어김없이 언니를 찾아왔던 것이다.

미순언니는 늘 방바닥에 이불도 펴지 않고 팔을 접어 만든 베개를 베고 누워서 잠이 들기 직전의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흔들었다.

'언니.. 이야기해 줘.. 그 이야기.. 손가락이 파닥파닥 하는 그거..'

벌써 잠에 취한 언니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이야기를 하다가 잠이 들어 이야기가 끊기면 나는 또 언니를 흔들었다.

그러면 언니는 너무 졸려 발음도 잘 안 되는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고 있었다.

'열 손가락이 모두 잘려서 파닥파닥 거리며 지푸라기 위를 걸어 다니는 거야..'

나는 그 부분이 시작되면 숨도 쉬지 못하고 이야기에 열중했다.

그 어느 누구의 이야기 보다 미순언니의 이야기는 가장 섬뜩했다.

미순언니는 그 시간에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야 가장 일거리가 많을 저녁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텐데…

매일 똑같은 이야기를 해달라는 사촌집 아이가 얼마나 성가셨을까…

미순언니의 이야기가 끝나고 잠깐의 깊은 잠에 빠진 언니의 쌕쌕거리는 숨소리가 방안에 고르게 퍼지면 그제야 나는 일어나 집으로 돌아왔다.


살다 보면 가끔 ‘미순언니'생각이 난다.

스무 살 남짓이었을 미순언니는 그 시절 많은 언니들이 그랬듯이 빠듯한 살림살이에 보탬이 되려고 서울의 낯선 집으로 출타를 했을 것이고, 그 집의 살림을 도맡으며 가장 예쁜 나이를 보내다가 적당한 자리가 나오면 시집을 보내졌을 것이다.

공지영 작가님의 ‘봉순언니’나 신경숙 작가님의 ‘외딴방’이라는 소설을 보면 우리의 ‘미순언니'들은 모두 별반 다르지 않게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사는 게 너무 당연한 삶 말이다.

신경숙 작가님의 '외딴방'에 나오는 어느 '미순언니'에게 작가는 묻는다.

어떻게 이 월급을 받아서 집에다 돈도 부치고 생활도 하느냐고...

그곳의 미순언니는 소리친다.

'치약하나 사면 삼 년 썼다! 왜?‘

이 문장 하나에 우리의 '미순언니'들의 삶은 다 들어있다.


온몸으로 친정집을 구한 '미순언니'들이 이제는 편안힌 노년기를 맞이했으면 좋겠다.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만을 위해 살면 좋겠다.

모든 짐을 내려놓은 어깨가 가벼워져서 자면서도 웃는 그런 날들을 살았으면 좋겠다.





그림은 <핀터레스트>




keyword
이전 02화나를 살린 톨스토이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