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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블루 Aug 15. 2023

1. 놋그릇 광녀

왜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마음이 사정없이 산란하여 누가 한마디만 하여도 머리채를 잡고 패대기치고 싶은 그런 날. 내 안의 자아는 거의 악마가 되어 있는데 이런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보여 줄 수가 없어  그 작은 악마 녀석의 머리를 숨을 참으며 꽈악 누르고 있는 날. 그 녀석의 꼬리라도 혹시 누가 볼까 봐 허둥거리는 그런 날.

그런 날이다. 일이 많아 늦게 퇴근한 남편에게 저녁 밥상을 차려준다. 크고 넓적한 놋그릇 대접에다가 방금 끊여낸 떡국을 담아낸다.

은빛 최상급 멸치로 국물을 내어 떡을 넣고 끓이다 떡이 부드럽게 퍼질때즘 참기름을 살짝 두른 생굴을 넣고 달걀을 보드랍게 흘린후 불을 꺼 끓여낸 고도의 시간 타이밍이 포인트인 굴떡국이다.

남편이 너무 맛있어 떡과 굴을 씹는 건지 삼키는 건지 모른 채 수저를 내려놓으려는 찰나에 빛의 속도로 그릇을 빼앗아 닦기 시작한다. 음식 얼룩을 남기지 않으려는 놋그릇 광녀의 기이한 행동이다.

그리고는 부엌 바닥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깨끗이 빨아 다림질해 두었던 그릇 닦는 리넨 행주로 놋그릇을 닦아 원래의 자리로 들여보낸다.

후우..... 숨을 뱉어낸다.


놋그릇은 아주 뜨겁게 먹고 싶을 때나 아주 차갑게 먹고 싶을 때 그 진가를 최고로 발휘한다.

가령 지방이 적절히 분산된 통갈비의 센터컷과 제주도 무를 크게 썰어 넣고 맑게 끓여낸 갈비탕이나 지방이 거의 없는 양지머리를 적당히 삶아 손으로 곱게 찢어 갖은양념으로 무쳐 끓인 육개장은 무조건 놋그릇에 담아내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운 날에는 낮고 자그마한 국그릇용 놋그릇에 금빛 그릇 색깔이 살짝 비칠 정도의 농도로 맛을 낸 메밀국수 소스를 담아낸다. 거기에 마차가루로 색을 낸 연둣빛의 메밀국수를 한 젓가락씩 담가 먹으면 열기가 입안을 거쳐 뱃속을 통과해 발끝까지 내려가 몸은 제 온도를 되찾은 느낌이 든다.

놋그릇을 꺼내 밥상을 차리는 날에는 평소에 삐딱한 자세로 밥을 먹던 아들 녀석 까지도 저절로 등이 쫙 펴지는지 점잖게 입을 다물고 밥 먹는 일에 열중울 한다. 놋그릇의 중후한 무게감이 "똑바로 앉아"라고 호령을 하나 보다. 그러고 보면 놋그릇은 그 누구에게도 점잖지 못하게 밥을 먹는 일을 허락하지 않은 듯하다.


마음이 아주 힘이 드는 날에는 일상의 작은 것에 정성을 들여 본다.

천천히 썰고 다지고 냉장고 문도 살포시 여닫고 냄비 뚜껑도 가만가만 들었다 놓는다.

마음속은 폭격기가 날아다니고 서로 치고받고 뒹굴며 육탄전을 벌이지만 그럴수록 나의 손은 천천히 정성을 다해 밥상을 차려 내고 그릇을 닦고 사뿐히 움직인다. 이런 나의 몸짓을 내 마음이 본다면 나를 좀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다.

삶은 살아간다가 아니라 살아내고 있다는 말이 어울리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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