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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eersjoo Nov 04. 2023

물건을 버리기 시작했다

인생 장기 프로젝트

몇 년 전 서점가에 '단샤리' 열풍이 불었다. 일본어이자 일종의 라이프스타일을 뜻하는 이 단어는 '불필요한 것을 끊고, 버리고,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서 단샤리가 크게 유행했던 결정적 계기는 2011년 봄 발생한 동일본지진이었다. 그 이전에도 정리에 대한 관심을 일본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는 있었지만, 집 안팎의 모든 것이 무너지고, 심지어 무너져 내린 집안 살림들 아래에 깔려 목숨을 잃은 사람들 마저 많았다는 것이 알려지며 온 나라가 물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불어닥친 비현실적 자연재해에 모든 것이 먼지처럼 사라진 것도 허무한데, 살 수 있던 사람마저 스스로 쟁여놓았던 물건들에 깔려 목숨을 잃었다니... 그 누가 물건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을 수 있었을까.


이러한 직접적 동기를 계기로 2010년대 중반, 일본엔 단샤리 열풍이 이어졌고 한국 또한 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가까이 자리하며 내내 아웅다웅하곤 하지만 그래서 더 서로의 영향을 많이 받는 두 나라는 지진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물론 두 나라의 단샤리에 대한 생각과 계기가 완전히 같을 순 없다. 하지만 '버림으로써 다시 찾는 자신'이라는 점은 모두를 관통했다.


내가 잃어버린 삶의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아니 다시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도전을 하기로 마음먹은 후 떠오른 것 중 하나도 단샤리였다. 대체 어떤 효과가 있길래 가족과 집을 모두 잃은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일까?


일단 이론으로 아는 것은 물건을 버리면 그곳으로 분배되는 관심과 생각이 나 자신으로 집중된다는 것이었다. 내일도 당장 사라져 버릴 수 있고 사는 데 큰 지장 없는 물건에 소비할 시간을 나에게 돌려 마음을 더 잘 돌볼 수 있다는 의미다.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금세 짠 하고 효과가 나타나는 도전은 아니지만 나는 어느 일요일, 나름의 단샤리를 시작했다.


욕심은 부리지 않았다. 시중에 판매되는 책이나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단샤리의 단계와 방법도 읽어는 보았지만 무리하게 따라 하진 않았다. 책을 낼 만큼 정말 별 거 없이 모두 버린 사람들의 과감함은 바로 따라 하기 힘들었다. 그저 내가 마음 편하고 소화할 수 있는 방법과 정도를 찾아가기로 마음먹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화장대였다. 가슴에 손을 얹고 최대한 솔직한 눈으로 바라보니 계속 사용하는 화장품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상당수가 서비스로 받아 여행 갈 때 쓰려고 구석구석 찔러 놓은 샘플, 유통 기한이 지난 걸 알면서도 얼마 쓰지 않아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는 팩트와 립스틱 등이었다.


화장대의 모든 물건을 앞으로 다 빼놓고 정말 매일 사용하는 것들만  한쪽으로 치웠다. 아직 많이 남았지만 유통기한이 지난 비싼 화장품들도 눈 질끈 감고 버렸다. 샘플은 날짜가 지나지 않은 것들과 지난 것들로 나누었다. 지난 것은 버리고 아직 지나지 않은 것은 매일 사용하는 화장품들보다 먼저 사용하기 위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정리했다. 여행? 언제 갈지도 모를 여행을 위해 또다시 쟁여놓을 순 없었다.

깔끔하게 정리한 화장대를 바라보는 짧은 순간들과 샘플을 하나씩 비워가며 패키지를 버리는 맛이 이상하게 즐거웠다. 버리기 아까웠던 기억은 생각보다 빨리 잊혔고 그저 홀가분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나의 단샤리 스폿인 화장대는 그렇게 새로운 기쁨과 위로를 주었다.  


약간의 정리만으로도 그 맛을 마음으로 느끼게 된 나는, 정기적이진 않지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곳곳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주말에 한 곳을 정해 정리하고 그것을 주말마다 반복하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화장대로 쓰이는 네 칸짜리 서랍장 속 옷들은 한 주에 한 칸씩 정리되었다. 양이 너무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막상 해보면 한 칸을 정리하는 것도 꽤 긴 시간과 결정 장애 극복을 위한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렇게 조금씩 하니 확 질려버려 오히려 더 하기 싫어지는 폐단을 막을 수 있었다.

 

주말 정기 정리 외에도 또 한 가지 나름의 단샤리 루틴이 있었다. 한 마디로 '하루에 하나 버리기'였다.

물론 이 또한 매일 반복되진 않았다. 오늘도 하나 버릴까 생각하다가도 그마저도 귀찮고 스트레스가 된다 싶으면 그냥 패스했다. 과정이 억지로 진행되기 시작하면 오래가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은 그동안의 많은 인생 경험을 통해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지금 빨리 하는 것보다 끝까지 해 내는 것이 중요한 심리 상태니까.

방법은 그날그날 떠오른 물건이나 눈에 걸리는 물건을 사진 찍어 기록해 놓고 버리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은 물건은 쓰레기통이나 재활용 박스에 간 후 그 물건에 대한 짧은 기록과 함께 개인 소셜 네트워크 채널에 기록되었다. (지금은 그 마저도 스트레스가 되어 잠시 중단 상태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마음 다독임이 중요한 지금의 나에게 스트레스는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니까.)


그렇게 나는 불과 1, 2년 전만 해도 절대 버리지 못했을 물건들을 꽤나 많이 정리해 왔다. 물건 하나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나에겐 장족의 발전이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1개를 버리고 비슷한 거 2개를 다시 구입하는 부정(ㅋ)을 저지르거나, 금전적 상황에 무리가 갈 만큼 비싼 물건을 스스로 합리화하며 할부로 구입하거나, 한동안 버리기를 전혀 하지 않거나 하는 등 부족한 점이 많았다. 하지만 그러한 시간들에 의미 없는 후회는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나는 나만의 기준을 세우고, 시행착오도 거치며 단샤리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프로젝트는 내가 죽는 날까지 계속될 것을 희망한다. 그래서 정말 내가 세상을 떠나는 그날엔 내 주위를 둘러쌌던 대부분의 물건을 스스로 정리 끝내 놓은 상태이길 바란다. 그때 누가 내 공간을 정리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할 일이라곤 최소한의 물건들만 쓰레기봉투에 넣으며 그렇게 비워진 공간에서 나를 추억해 주는 것뿐이길 바란다.


목표치에 비하면 아직 버릴 물건이 한참 남았지만, 그리고 내 인생 또한 무수히 길게 남았겠지만(난 건강히 오래 살고 싶다. ㅎ) 물건을 버림으로써 나 자신에게 조금은 더 집중하게 되는 경험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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