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 회복, 그리고 희망의 일반화

4장 3절

by 정신과의사 이주영

♪ 코나 -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



소아정신과 전임의 수련 중 가장 큰 배움 중 하나는 아이들이 또래 아이들과의 관계를 통해 정서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었다. 다른 아이들과 얼굴을 ‘마주 보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기회는 어린아이들의 발달을 촉진시킨다. 실제로 아이들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축복임을 깨달은 것은 코비드 팬더믹 시키였다. 그래서 케임브리지의 살인적 물가에도 불구하고 첫째 아이가 안정적으로 걷기 시작할 때 파트타임으로 보육 기관에 보냈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4살에 가까워질 무렵 “넌 나쁜 아이야 (You are a bad boy)!”라는 말을 배워왔다. 아마도 친구들과 놀다가 누군가가 쓰는 것을 듣고 배운 것 같았다. 이 표현은 문장 구성과 강세의 위치가 아이들 입에 딱 맞게 잘 만들어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는 표현이었다. 아이는 집에 와서 우리 부부나 자기 동생이 원하는 것을 해주지 않으면 이 표현을 썼다. 아이는 우리와 자신의 내적 상태가 크게 어긋나 있음을 참으로 찰진 문장으로 전해오는 것이었다. 영유아가 관계의 단절을 체감했음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하는 문장이 또 있을까?


“너 진짜 화난 거 같구나. 충분히 그렇게 느낄만한 이유가 있겠지. 그런데 다음부터는 ‘넌 나쁜 아이야’ 보다는 ‘그건 나쁜 결정이야’라고 말하자.”


아이가 반복하는 문장을 듣고 있다가 위와 같이 말했다. ‘나쁜 아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인격이나 존재를 깎아내리는 듯한 뉘앙스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언어는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발화자의 내적 세계에도 영향을 미친다. 존재론적으로 ‘나쁜’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지면, 그 사람과는 관계를 회복하고자 하는 동력이 무의식 중에 떨어질 수 있다. 반면, ‘나쁜 결정’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의 순간적인 판단 오류를 강조한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를 망가뜨리는 실수를 필연적으로 할 수밖에 없기에, 사실 ‘나쁜 결정‘이라는 표현은 마치 생리적인 현상에 대한 언급과 같은 수준의 발화이다. 감기가 걸린 사람에게 “너 기침하는구나!” 정도에 상응하는 발화랄까.


올바른 언어의 사용은 관계의 회복을 돕는다. 미묘한 언어 사용의 차이이지만 ‘나쁜 아이’라는 표현은 관계 회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실제로 일어난 갈등의 정도를 증폭시키는 언어 사용을 지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말처럼 쉽지 않은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인생 후반전에는 언어를 더 정제해서 사용해야겠다고 나 또한 다짐하고 있다.


이렇게 아이가 “나쁜 아이”라는 표현을 쓰고 내가 그걸 고쳐주려는 상호작용 자체도 우리 관계에서 잠깐의 단절로 볼 수 있다. 아들은 내가 표현을 바꾸라고 권유한 것을 지적으로 받아들이고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들이 그런 표현으로 상대방에게 실망을 안기고 있다는 점에 나 또한 순간 실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3살짜리 아이들이 흑백 논리에 빠지기 쉽다는 점을 되새기며 스스로를 제어한 것이다. 아주 짧았던 관계의 단절이 회복되면서 나는 아들과의 관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아들이 내 권고과 우려를 끝까지 듣고 있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아이도 나를 친구들과 더 끈끈한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응원하는 아버지로 이해했으면 한다.




오늘 내가 경험한 삶이 그 이전까지 자신이 써온 삶의 이야기에 부드럽게 삽입될 수 있을 때 내면이 풍족한 삶을 살 수 있다. 어떤 곳에서 어떤 일을 겪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사건을 내 인생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로서 받아들일지이다. 이러한 의미 형성 과정(meaning-making)은 경험을 통해 풍부하고 유연해진다. 그런데, 의미를 만들어가는 연습은 두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단절과 회복 포함) 상황에서 혼자일 때보다 효과적이다.


A라는 개인이 n 가지 감정 및 신체 상태 (두근거림, 기운 없음 등 포함)의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A의 뇌에서는 이러한 내적 상태를 인지하여 n 가지의 의미 (또는 맥락)을 각 순간에 부여한다. 이제 B라는 개인을 상정하고 그 사람은 m 가지 감정 및 신체 상태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A와 B 가 상호작용하는 상황을 이제 떠올려 보자. 두 사람이 상호 작용하는 맥락에서 관여하는 감정 및 신체 상태의 조합은 대략 nm 가지가 된다. 이건 두 사람의 정신 상태가 완전히 독립적임을 상정했을 때의 개수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이것 보다 더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겠다. A의 뇌는 혼자 있을 때 보다 (n) 더 많은 (nm > n) 상황에 대한 의미를 생성해 낼 것을 요구받는다. B의 뇌 또한 마찬가지이다 (nm > m). 알파고와 같은 바둑 인공지능 시스템도 다른 인공지능과의 상호작용인 대련으로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게임의 의미)을 익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 많이 상호작용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사회적 맥락에서 의미를 도출하는 연습을 하게 됩니다. 이 수많은 조합의 관계들은 각각 단절과 회복을 동반하게 됩니다. 그중 어떤 것들은 다른 것보다 더 극적인 파괴와 재건일 수도 있겠죠.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이러한 상호작용들을 통해 무의식 중에 대규모 의미 형성 과정에 노출이 되면서 자라납니다.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messy) 이러한 수많은 단절과 회복 과정을 거치면 개인은 신뢰 있으며, 친밀하면서도, 안전한 관계를 맺는 법을 체득하게 됩니다.



다니엘 콴 감독의 2022년 작 더 모든 날 모든 순간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영화는 관계의 단절과 회복이 가지는 의미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작품이다.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자라난 사람이라면 이 영화에서 느끼는 바가 많을 것이다. 초반에 흐르는 B급 SF 감성에 휩쓸려 중지 버튼을 누르지 않는다면 많은 감동과 따뜻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30년 이상을 지내다가 미국으로 건너와 살고 있는 이민자로서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


영화의 주인공의 에블린(양자경 분)은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이다. 본국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축복받지 못한 삶을 살던 에블린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남편 웨이먼드 (키호이콴 분)을 따라 태평양을 건넌다. 세탁소 운영인이라는 자리는 자신이 한때 꾸었던 꿈에 비하면 한없이 미천했다. 게다가 딸 조이(스테파니 수 분)가 성소수자 삶을 사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에블린은 집착적일 정도로 바쁘게 일에 몰두하면서 가족들과 심리적 거리를 둔다. 자신이 꿈꾸었던 이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남편과 딸을 바라보는 것은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이런 에블린과의 관계에서 회복의 기미를 볼 수 없었던 레이먼드는 이혼 서류를 준비하고 조이는 깊은 허무와 우울에 빠져든다.

everything-everywhere image.jpg 더 모든 날 모든 순간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은 관계 단절의 보편성과 회복의 지저분함을 B급 감성으로 담았다.


멀티버스(Multiverse) 세계관을 도입해서 영화는 한없이 슬플 수도 있었던 이야기에 위트를 불어넣는다. 여러 평행 세계(alternate universe)를 여행하는 에블린은 현실에서와 조금씩 변형된 모습의 딸을 발견한다. 하지만, 조이는 모든 평행 세계를 꿰뚫을 수 있는 에블린의 주적(archnemesis) 임이 밝혀진다. 둘의 관계는 깨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임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에블린은 이걸 통해서 자신이 꿈꾸어 오던 “이상적인 딸”은 어느 세계에도 없음을 깨닫는다. 자신과 딸은 지저분할 정도로(messy) 단절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숙명임을 받아들인다. 이것을 인정한 에블린은 딸과의 단절된 관계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면서 삶의 새로운 면을 보게 된다. (영화는 이 시점에 에블린이 ‘새로운 눈’을 뜨게 되었음을 위트 있게 시각화한다!) 관계의 단절, 그리고 그 단절에 기여한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회복의 시발점이라는 것을 영화는 잘 보여준다.




폴(가명)은 내가 소아정신과 전임의 시절에 나와 상담 치료를 했던 고등학생이었다. 치료는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당시가 코비드 시간이기도 했고, 병원에 오가는 데에 시간이 너무 걸려 학업에 지장이 생긴다는 이유에서였다. 치료를 안 하는 것보다는 원격으로라도 만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치료는 시작되었다. 놀랍지 않게도 폴은 치료 내내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내가 말을 하면 거기에 덧붙여 몇 마디 대꾸를 하는 정도였다.


폴의 부모님은 둘 분 다 대학 교직에 몸 담고 있었다. 중학생 때까지 최우수 학생이었던 폴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성적이 곤두박질했다. 뒤늦은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ADHD) 진단을 받았다. 집중력이 낮아도 출중한 지능으로 중학교 때까지는 성적을 유지하는 것이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과제의 양이 폭발적으로 많아지게 되면서 폴은 과제의 제한 기일을 지키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다. 농구를 할 때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공을 시야에서 빈번히 놓쳤다. 치료 시간에 폴은 자신의 부모님 모두가 자신의 나이 때에 스포츠에 출중했음을 이야기했다. 양쪽 부모님이 모두 선천적인 스포츠 실력과 독서를 사랑하는 성향으로 훌륭한 명문대에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여러 번 반복했다. 부모님 두 분이 교직에 있는 것이 능력을 낭비하는 것 같다며, 자신은 교직에 절대 몸담지 않겠다는 말을 치료 시간에 하곤 했다. 물론 폴은 부모님 면전에서 그런 얘기를 많이 했다. 치료에 오게 된 것도 단순히 성적이 떨어진 것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부모님에 대한 적개심과 공격성 때문이었다.


ADHD 치료약을 먹기 시작하면서 폴의 성적이 향상되었다. F 학점을 받을까 더 이상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성적이 나아져도 폴은 부모를 계속 원망했다. 집에서 부모와 대화를 하지 않았고, 작은 일에도 부모에게 불같이 화를 났다. 부모님은 폴이 혹여나 까먹을 까봐 ADHD 약을 아침마다 챙겨줬는데, 폴에게는 이것이 매일 자신의 부족함을 각인시켜 주는 행위였다. 약 없이도 잘 학업을 마쳤던 부모에 대한 원망이 컸다. 이 무렵 치료시간에 나는 폴이 나를 더 멀리하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한 관계의 단절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마도 폴의 마음속에서는 나도 부모와 비슷한 대상으로 보이고 있었으리라. 혹시나 더 강력해지는 폴의 원망과 공격성이 ADHD 약의 부작용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거의 모든 ADHD 약을 돌아가며 시도해 보았다. 하지만, 폴의 원망은 어느 약을 써도 사라질 기미가 없었다. 약을 먹지 않았던 주말에도 부모와의 말다툼은 끊이지 않았다. 나는 가족 치료를 권했지만, 폴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폴은 스마트폰을 수업시간에 사용하다가 선생님에게 제지를 당하는 일이 있었다. 폴의 부모님은 이 사실을 알고 통신 서비스를 끊어버렸다. 스마트폰 때문에 진짜 해야 할 일에 집중하지 못했던 폴은 부모님과 잦은 실랑이가 있었던 터다. 폴은 이에 분노를 했고, 집에 있는 물건을 다 집어던지기 시작했다. 폴의 부모님은 침실로 대피를 하고 문을 잡궜다. 부모님은 잠긴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폴에게 계속하면 경찰을 부른다고 소리 질렀다. 여기에 더 격앙된 폴은 드라이버를 가지고 와서 문고리를 뜯기 시작했다. 문을 강제로 열고 침실로 들어온 폴을 향해 그의 아버지가 달려들었다. 폴은 제압당하는 과정에서 기도에 충격을 받아 쓰러졌고, 부모가 그를 제압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폴은 응급실로 이송해 갔다. 폴은 응급실로 가는 동안 계속 서글피 울었다.

폴은 다행히 입원은 피했다. 전화를 걸어 나는 폴을 진료실로 직접 올 수 있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해서 폴을 처음으로 대면으로 만났다. 그는 진료실에 들어와 가장 구석자리에 놓인 의자에 가서 앉았다.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여전히 말을 많이 하진 않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쭉 들은 후 우린 서로를 쳐다보며 침묵을 지키며 한동안 앉아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두려움에 떠는 아이가 보였다. 최우수 성적으로 중학교를 졸업하고 갑자기 성적표를 채웠던 F 학점. 부모님이 보내오는 자신을 포기한 듯한 눈빛.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세상에 나와버린 자신의 공격성. 부모에게 물리적으로 제압당하고, 경찰차에 실려 병원까지 실려간 경험까지.


“폴, 이야기를 들어보니 너 진짜 무서웠을 거 같다. 진짜 무서웠을 상황이야.”


그 말을 들은 폴은 처음으로 눈물을 쏟았다. 나는 조용히 앉아 폴이 말하기를 기다렸다. 폴은 눈물을 훔치며 말을 잊기 어려워했다. 말을 잇기 어려워하는 폴에게 나는 함께 음악 듣는 걸 제안했다. 폴이 선곡한 노래를 유튜브로 찾아 틀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음악을 틀었지는 적지 않겠다). 한 곡이 끝나면 폴이 다음 곡을 추천해 줬다. 그렇게 진료실에서 몇 곡을 함께 연달아 들었고, 나는 곡을 떠오르는 감상을 폴에게 말해줬다. 폴은 자신이 각 노래를 왜 좋아하는 지를 나에게 알려줬다. 폴은 자신을 열어보이기 시작했다. 나와 폴과의 관계는 회복되고 있었다. 치료 시간이 끝나기 전에 가족치료를 다시금 폴에게 제안했다. 폴은 고민해 보겠다고 하면서 진료실을 나섰다. 그 후 폴은 실제로 부모님과 가족치료를 받았다. 폴은 가족치료에 집중하고 싶다며 나와의 개인 치료는 중단했다. 한 달에 한번 약물 조절을 위해 만났다. 내가 수련을 끝내며 폴과 작별을 했던 시점에서는 그와 부모와 관계는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내가 폴을 위해서 진료실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와의 좀 더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진료실에서 나는 “이주영”이라는 한 명의 정신과 의사이기도 하지만, 환자들은 보통 ‘남자‘, ‘성인‘, ‘의사‘ 혹은 ‘내가 아닌 타인‘ 등 삶에서 축적한 어떤 선입견을 나에게 부여한다. 정신분석에서 이러한 선입견을 ‘대상 표상(object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른다. 그렇기에 많은 환자들은 나를 한 인격체로 이해하기 전에 이미 나와의 관계를 단절해 놓는다. 폴도 처음부터 나를 밀어낸 것도 비슷한 연유에서였다고 생각한다. 폴의 경우와 같이 진료실에서 나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 성공한 환자들의 경우 진료실 밖에서도 타인과의 관계 회복에 대한 희망과 자신감을 얻게 된다. 이러한 회복의 일반화 과정은 설령 정신치료의 경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회복을 많이 경험하며 자란 아이는 타인과의 단절된 관계들도 복구할 수 있는 신념뿐 아니라 기술(skill)을 가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관계에서의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신뢰(trust)를 기반으로 한 관계를 만들어나갈 수 있게 된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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