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존, 그리고 의식적 수준의 학습

5장 2절

by 정신과의사 이주영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Larry Carlton – Room 335



CHA 병원에서 소아정신과 전임의 과정을 시작했던 2021년 7월이었다. 전임의 1년 차에게는 12개월 동안 매주 하루 오후 2시간 반씩 약물 조절 환자를 외래에서 볼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다. 일주일에 새로운 환자를 최대 1명 배정받으며, 60분간의 시간이 주어진다. 나머지 90분 동안은 재진 환자를 하루 최대 3명까지만 볼 수 있도록 보호받는다. 전공의 3년 차 때 이미 일 년 내내 외래 업무를 봤던 터라 업무량이 적다고 느꼈다.


전임의 1년 차에 배정된 첫 신환은 외래 지도 교수님의 몫이었다. 지도 교수님의 초진 면담을 관찰했다. 당시 펜더믹 상황이었기에 면담은 원격으로 이루어졌다. 교수님은 환자를 평가하면서 평소 진료 페이스대로 진료 기록을 작성했다. 전통적으로 CHA 병원에서는 첫 외래 진료 수업은 철저한 관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두 번째 환자는 이전 관찰 경험을 바탕으로 내가 면담을 진행했다. 내가 면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지도 교수님께서 의무 기록을 작성해 주셨다. 수동적인 관찰자의 역할이 아닌, 좀 더 능동적인 참가자로서 초진 환경에 노출된 것이다. 세 번째 환자는 내가 면담을 진행하고 의무기록을 작성했다. 교수님은 전 과정을 함께 했다. 이후 신환 및 재진 환자 방문 시 교수님은 인터뷰 중간에 들어와 몇 분간 지켜보다가 나가셨다. 팬더믹 시기에 원격 인터뷰였기 때문에 내가 놓치고 있는 것이 있으면 실시간으로 채팅 메시지를 보내주기도 하셨다. 매주 30분 교수님과 진료에 대해 1:1 지도받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인터뷰 스타일이나 치료 방향을 결정하는 사안에 대해 피드백을 받을 기회가 충분히 있었다.


소아의 경우 성인보다 면담 시 고려해야 할 변수들이 더 많다. 대부분 아이들은 자신이 원해서 진료실을 찾아오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의 다시 진료실에 오고 싶게 만드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사실 소아 환자 초진의 목표는 단 하나이다. 다시 진료실에 오게 만드는 것. 아무리 훌륭히 정보를 얻어내고 평가를 마쳐도 환자가 돌아오지 않으면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 아이들이 알아듣기 쉬운 단어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예를 들어, 불안(anxiety) 대신 부끄러움(shyness)이나 걱정(worry)을 사용했으며, 복부(abdomen) 대신 배(belly 혹은 tummy)를 사용해야 했다. 미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은 나로서는 이런 쉬운 단어를 골라 사용하는 게 더 어려웠다.


정신과에 처음 오는 아이들을 위해 다음에 어떤 질문들이 나올지 예상할 수 있게 성인보다 더 자주 구조화가 필요했다. 예를 들어 “다음에는 과거 어떤 치료를 받았었는지에 대해 질문을 몇 개 할 거야”와 같은 문장들이다. 부모와 어떤 시점에 진료실에서 분리를 시킬지, 누구와 면담을 먼저 진행할지, 약물 부작용은 누구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발달 상황, 가족 간 역동적 관계, 그리고 학교 생활에 대해서는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지. 대기실에서 진료실까지 함께 걸어가는 동안에는 어떤 질문이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그리고 통역사는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CHA병원에는 포르투갈어를 주 언어로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아주 많았다)까지도. 많은 것들을 새롭게 배워야 했다. 원격 진료 상황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배우는데 생각보다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진료실이 아닌 안방에서 모니터를 통해 모든 것을 바라보니 집중력이 떨어지고 산만해졌기 때문이다. 전문의 2년 차가 되어서야 코로나 유행이 잠잠해졌고 외래 업무는 다시 대면(in-person) 진료를 원칙으로 회귀되었다.


전문의 2년 차가 되었을 때에도 내가 60분 내에 초진 면담을 끝내는 것을 어려워하자 당시 지도 전문의였던 데브라 로젠블룸(Debra Rosenblum) 교수님은 자신감이 생길 때까지 자신의 초진 진료를 참관할 수 있게 허락해 주셨다. 언제까지 들어와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큰 안도가 되었다. 이후 5회가량의 참관을 통해 로젠블룸 교수님의 초진 면담의 흐름과 질문들을 기록했고, 나중에 이것들을 하나하나 다 외웠다. 물론, 그 이전 일 년간의 수련에서 나의 부족함을 곱씹을 수 있는 시간적, 심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동기가 생겼던 것 같다.


그 후 초진 면담에 속도뿐 아니라 자신감이 붙으면서 전임의 2년 차 때 요구사항인 매주 60분 초진 2회, 30분 재진 약 10회 스케줄을 부담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수련이 끝난 지금은 매주 60분 초진 5회, 30분 재진 25-35회가량을 소화하면서 외래에서 풀타임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수련의 때 안전하게 보호된 환경에서 지도 교수님들의 진료를 직접 관찰하고, 관찰한 것을 실전에 적용하며, 지속적으로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기에 지금의 업무도 자신감 있게 수월하게 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러한 배움의 과정을 통해 나는 한 개인이 새로운 기술(skill)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학습하고 체득하는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임상 기술을 갈고닦은 것 외에 “어떻게 다른 사람을 잘 가르칠까”에 대해 배우면서 인간의 교육과 의식적인 학습(Conscious-level learning)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갖게 되었다.


CHA 병원에서 전임의로 있으면서 했던 나의 발표는 모두 녹화되었다. 녹화본 링크가 첨부된 이메일에는 청자로 있던 교수님들의 공식 피드백이 적혀 있었다. 발표 내용 자체뿐만 아니라 발표의 전달력에 대한 평가서를 항상 받게 되어 있는 시스템이었다. 여기에는 발표 형식, 눈 맞춤, 목소리, 페이스, 청자의 집중력을 높이기 위해 기울인 노력, 슬라이드 구성 등에 대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었다.


fellowship.jpg 동고동락했던 하버드의과대학 소아정신과 전임의 동료들 - 2021년 젠 해리스 교수님 댁에서


전임의 2년 차에는 전직 교사이셨던 산드라 드영(Sandra DeJong) 교수님이 진행하시는 강의법 수업이 있었다. 성인 학습 이론(adult learning theory)에 대한 수업 이후에 전임의 동기들과 교수님을 청자로 15여 분간 자신이 원하는 내용과 형식으로 발표를 하고 피드백을 받는 시간이었다. 성인 학습 이론은 일방적인 강의 형식의 교육이 얼마나 비효율적인지를 강조한다. 그렇기에 동기들 모두가 굉장히 참신한 형식의 전달 형식을 준비해 왔다. 당시 정신과 전공의 수련 평가(PRITE)를 위한 문제를 만드는 활동을 하고 있던 나는 “어떻게 객관식 시험 문제를 잘 낼 것인가?”를 주제로 동기들에게 강의를 했다.


세 가지 의학적 지식 각각에 대해 2가지 다른 형태의 5지선다 객관적 문제 (즉, 총 6문제)를 만들어 동기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리고 각 내용에 대해서 어떤 쪽이 지식을 더 잘 평가할 수 있는 문제인지를 둘씩 짝을 지어 의논하도록 하고, 마지막 6-7분은 왜 어느 쪽이 더 우월한 문제인지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알리며 마무리하는 형식이었다.


모의 강의를 마치고 나는 내 진료실로 보내졌다. 진료실에서 있으면서 내 강의에 대한 자가 평가를 메모지에 써 내려갔다. 잘되었다고 생각하는 점과 부족했던 점 모두를 기록하도록 지시를 받았다. 강의실에서 교수님과 동기들이 모여서 내 강의에 대하여 공식적인 평가하기 시작했다. 주어진 시간이 지나고 나는 메모지를 들고 강의실로 돌아갔다. 동기들 앞에서 먼저 자가 평가 내용을 발표한다. 그리고 동기들 중 한 명이 그룹 토의에서 나온 피드백을 대표로 읽었다. 자가 평가와 타인에 대한 평가를 비교하면서 내가 혼자서 보지 못하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또한, 자가 평가 시 내가 스스로에게 얼마나 엄격한지를 가늠하는 기회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이후, 나는 강의 전달 방식에 이전보다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되었다. 내용이 좋아도 전달되지 않으면 지식은 전파되지 않기 때문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재미있고 쉽게 핵심 내용을 얻어가도록 하면서도 흥미를 불러일으켜 더 자세히 알고 싶을 경우 필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좋은 강의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체감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는 내적 기준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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