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심연(深淵)을 마주하며

6장 1절

"... 당신이 방향을 바꾸면 모래폭풍이 따라온다. 다시 방향을 바꾸면 폭풍도 이내 방향을 바꾼다. 이 과정을 반복하며, 황혼의 죽음 마냥 불길한 춤을 추는 듯하다. 이 폭풍은 멀리서 불어온 것이 아니라, 당신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해변의 카프카] 중




어둠.


인생의 어둑한 곳에 존재하는 상처.


의식이 닿지 않는 곳에 깊이 있길 바라지만, 예기치 않은 시점에 찾아오는 외상의 기억들.


심리적 외상(psychological trauma)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겠다. 무거운 주제를 갑자기 불쑥 꺼내서 당황할 수도 있겠다. 사실 앞의 여러 장을 할애하면서 놀이, 의존, 관계의 단절과 회복에 대해 소개한 이유는 이번 장의 외상의 개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뜸을 들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도입부에 몇 개의 문장들을 추가로 적어보았다. [해변의 카프카]는 입시라는 어둠의 끝에서 잠시 희망을 보았을 시기에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이었다. 인간의 외상 경험과 거기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내면의 허무(虛無)를 이 작품은 잘 담았다. 외상이라는 개념에 무지한 시점에 읽었지만, 이 작품에 묘사된 상실과 아픔은 언어를 초월하는 마음의 위로와 울림을 주었다.

book cover.jpg 표지가 매우 맘에 들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해변의 카프카]


심리학에서 외상(trauma)은 인간이 자신의 대응 능력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수준의 고통을 경험했을 때 이어지는 심리적, 감정적 반응 전체를 기술하는 용어이다. 이 글에서는 특별히 인생의 초반부에 자신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중요한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외상에 집중하겠다. 모든 사람들은 어린 시절 어느 순간에 분명 ‘상처받은 아이’였다. 앞에서 기술했듯이 어린이들의 생물학적인 의존 욕구는 강하고, 이를 양육자가 모두 충족시키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들은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수많은 작은 단절을 경험하며 상실의 상처를 험한다. 그 이후 관계의 회복 노력을 통해 작은 상처들은 덮이고, 아이들은 희망적인 대상관계를 내면에 키우게 된다.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큰 외상을 경험하는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인간의 뇌는 그런 경우 생존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그 상처를 의식의 수면 아래에 끌어내린다. 마치 기억 상실이 일어난 마냥 큰 기억의 조각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외상의 가해자의 공격성을 닮아가며 자신에게 벌어진 외상을 '정상 범주의 사건'으로 만들기도 한다. 의식적인 수준에서, 의도적인 노력으로 이러한 행동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개체의 생존을 위해 뇌는 내부의 신경망을 재구성하여, 생존을 최우선으로 하는 행동을 유도한다. 하지만 외상의 상처가 깊은 무의식으로 강등되더라도, 그 영향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생 초기에 겪은 외상의 경험은 인간의 정신 및 신체 발달에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내가 소아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결심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어린 시절 심리적 외상을 경험한 환자들의 치유를 돕는 정신과 의사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연약한 시절, 어둠을 마주한 어존재들에게 믿고 의존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역경을 역경이라고 인지할 수 있는 지식을 축적하지 못한 아이들, 그리고 자신이 타인의 도움을 급하게 필요한 존재하는 것을 모른 채 세상을 살아가는 아이들이 편안하게 의지하며 찾아올 수 있는 그런 의사가 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바로 내가 그런 사람을 필요로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 Lifehouse – Hanging by a Moment



어릴 적 나는 폭력을 증오했다. 지금도 그렇다. 사실은 무서웠다. 폭력에 대한 나의 반발심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용감한 척을 했었다. 기다란 제도용 자, 가장자리를 잘 사포질 했던 ‘사랑의 매’, 테이프를 두껍게 갑은 굵은 나무 막대기, 그리고 야구방망이가 내 몸에 와서 다양한 형태로 부딪혀도 말이다.


'나만 맞고 있는 것도 아닌데 뭐...'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모두가 가해자와 피해자로서 폭력의 장에 공존하는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때 무슨 벌이든 담담하게 받으려고 했다. 바닥에 머리를 박고 뒷짐을 지도록 요구받아도, 한 시간 내내 교실 뒤에서 손을 들고 서있어도. 마지막엔 항상 손을 털고 콧웃음을 치며 자리로 들어가려고 했다. 힘든 모습을 보이면 패배자가 되어 버릴 것만 같아서. 엉덩이와 허벅지의 멍은 검은색, 푸른색, 녹색 물감이 지나치게 두껍게 뒤엉켜 마르기를 기다리는 한 폭의 유화였다. 누가 이렇게 두껍게 물감을 짰냐며 비판을 하기 시작하면 내 인생이 너무 힘들어질 것 같았다. 수치심에 나는 그 작품을 가려야만 했다. 그 작품은 소장하고 있는 나를 부끄럽게 했다. 나 스스로가 부끄러웠기에, 내 인생에서 '주변 환경'이 불행했다고 확신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폭력의 피해자라고, 나의 '부족함'으로 학대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고. 이러한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없었던 나의 참 서글픈 어린 시절이었다.


아침 등교 시간부터 몽둥이 세례를 한바탕 받거나, 머리 정중앙을 이발기로 밀리고 나면, 어떤 이유로 그런 벌을 받게 되었는지 따위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런 위해를 내게 가한 선생들을 향한 복수심이 불타올랐을 뿐이다. 폭력은 공기처럼 내 어린 시절을 채웠다. 이러한 삶 속에서 나 자신도 놀랄 만큼 폭력적인 몽상(reverie)과 환상(fantasy)이 나를 채운 적도 있었다. 다행히, 그 수많은 이미지(image)와 생각들은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스스로를 공격성을 가진 인격체로 받아들이는 것이 무섭기만 했다. 당시 믿었던 하나님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구체적으로는, 끔찍한 일이 학교 선생님들에게 벌어져 다시는 보지 않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물론 하나님은 그 약속을 지켜주지 않으셨다. 학교를 아얘 안 가버리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그것은 내가 그들에게 패배를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럴 수는 없었다.




한국에서의 폭력이 더 괴로웠던 이유는 초등학교 2학년 때 캐나다에서 거주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캐나다에서의 12개월은 너무나도 황홀한 시간이었다. 지구 반대쪽에서는 이런 삶이 가능하다는 걸 알아버린 것이다. 처음 캐나다로 건너갔을 때 나는 영어를 이해하지도 말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 윽박지르거나 체벌하는 선생님은 없었다.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만 보여도 선생님들이 함박웃음을 지으시며 ‘잘했어요(magnificent)’ 도장을 숙제장에 꽝꽝 찍어주셨다. 부족한 영어를 따라잡기 위해 여름 방학에도 학교를 나가야 했었지만, 학교에 있는 것이 너무나 좋았어서 전혀 개이치 않았다. 등교시간이 기다려졌던 캐나다에서의 삶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많이 울었다. 대조군이 생기는 순간, 삶에서 당연하다고 생각되었던 신념과 명제들이 무너질 수 있다. 이것은

main_slider_marlborough.jpg 캐나다에서 1년간 다녔던 말보로 초등학교 (Marbourough Elementary School). 밴쿠버 메트로 지역에 소재한 공립학교이다.


미국 소아정신과 전임의 프로그램에 지원할 때 썼던 자기소개서(personal statement) 첫 문단에 한국에서 어린 시절 경험한 폭력에 대해 적었다. 폭력을 겪으며 내가 깨달은 것, 그것으로 인해 한동안 잊고 지내왔던 것, 그리고 회복에 대해서. 최대한 많은 프로그램에서 인터뷰를 받고 싶었다면, 굳이 이런 내용을 적일 필요가 없었다. 심리적 외상을 치료하는 전문가로 수련을 받고 싶었던 나는 굳이 이 사실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과거 폭력에 노출되었던 경험 때문에 면접에 초청하지 않는 수련 프로그램에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배울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당시 전임의 면접 과정에서 CHA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곳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련 커리큘럼의 탄탄함과 교육을 향한 구성원들의 불타는 열정 이상의 뭔가를 느꼈다. CHA병원 면접관 4분은 한 명도 빠짐없이 내 어린 시절 경험에 대해 질문하셨다.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내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게 했는지, 그 경험이 정신과의사로서 환자를 볼 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가족이나 사회(한국과 미국 모두)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되었는지 등을 질문받았다. 당시 면접관 중 한 분이었던 아델 프레스만(Adele Pressman) 교수님은 어린 시절의 역경은 무서움에 떨고 있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의사가 되는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응원해 주셨다. 면접이 끝난 뒤 고민하지 않고 CHA를 1순위 희망 프로그램으로 올렸다. 그리고 운이 좋겠도 CHA에 매치 (Match. 미국에서 지원자가 제출한 희망 프로그램 목록과 각 프로그램에서 제출한 희망 지원자 목록을 컴퓨터가 조합해서 최종 결과를 도출하는 과정) 되어 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전임의가 되어 다시 만난 프레스만 교수님은 2년 간 내가 지나치게 이론에 치중하려는 경향을 보일 때마다, 아이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편안한 환경에서 할 수 있도록 돕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그 후 아이들의 이야기를 있어 보이는 정신분석 이론에 끼어 맞추는 것보다 더 집중해서 들어야 함을 강조하셨다. 그러고 가르침의 모든 순간에 항상 따뜻함을 유지하셨다.



CHA병원 (그리고 그 전신인 Cambridge City Hospital)은 역사적으로 보스턴 북쪽지역을 책임지는 지역 안전망(safety net) 병원이었다. 수많은 이민자들과 가난한 이들의 심리적 외상이 이곳에 머물렀고 역사가 되었다. 발달 트라우마 (Developmental Trauma) 개념을 정립한 베셀 반더 코크 (Bessel Van Der Kork) 교수와 복합 외상 (Complex Trauma) 개념을 널리 전파한 주디스 허만 (Judith Herman) 교수 모두 CHA에서 심리적 외상 환자들을 돌보았다.



cahill house pre post.png (좌) 1930년대 Cahill House (우) 현재 CHA병원. 우측에 보이는 Cahill Building은 신관에 연결되었으며 정신과 입원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미국으로 넘어오기 전, 한국에 정신과 전공의 수련을 받은 후에도 심리적 외상에 대해 많이 무지했다. 당시 심리적 외상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는 대형 사고나 자연재해에 관한 정신적 반응이라고 이해했다. 즉, 단일 사건 외상(single-incident trauma)에 국한하여 심리적 외상을 이해하고 있던 것이다. 심리적 외상은 이것을 넘어서는 정의가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복합 외상(Complex trauma) 개념이다. 복합 외상은 오랜 기간 지속된 학대(abuse)나 방임(neglect)으로 인해 한 개인이 장기적인 심리적 영향을 받는 상황을 의미한다. 학대나 방임은 타인과의 관계(혹은 그 부재)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나는 복합 외상을 관계 외상 (Relational trauma)의 범주에 넣어서 생각한다. 안전하고 의존할 수 있는 관계가 가지는 긍정적인 생화학적 영향력을 앞장에서 나열했었다. 이번 장에서는 그와 반대로 관계 외상이 한 개인의 뇌 발달과 평생의 삶에 걸쳐 어떤 흔적을 남기는지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관계 외상은 그걸 경험한 사람의 감정, 행동, 대상관계, 그리고 삶의 의미에 까지고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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