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3절
"문득 이 세상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느낌에 그녀는 놀랐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살아본 적이 없었다. 기억할 수 있는 오래 전 어린 시절부터, 다만 견뎌왔을 뿐이었다." - 한강 [채식주의자]
"내 슬픔은 모두 내면에 있다. 겉으로 보이는 애도 행위는 고통받는 영혼에서 조용히 부풀어 오른, 보이지 않는 슬픔의 그림자일 뿐이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리처드 2세]
네이트(Nate)를 만난 건 CHA병원 소아 입원 병동에서 였다. 내가 네이트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아이는 큰 목소리로 나이에 걸맞지 않은 걸쭉한 욕설을 내뱉으며 복도를 뚜벅뚜벅 가로지르고 있었다. 복도를 걸으며 두 팔을 권투하듯 휘두르곤 했는데, 나이에 맞지 않게 큰 네이트의 덩치 때문에 성인인 나도 꽤나 위협적이라고 느꼈다. 네이트는 만 5살 남자아이였다. 양부모(Adoptive parents)는 네이트가 집에서 공격적인 행동과 언행을 지속해서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경찰을 불렀다고 말했다. 경찰은 네이트를 CHA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왔고, 의료진은 타해 위험성이 크다고 판단해서 양부모에게 네이트의 입원 치료를 권유했다.
네이트가 태어났을 때 그의 친모는 막 20살 생일을 맞았다. 네이트의 친부와 친모는 법적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었다. 친부는 임신 시부터 육아를 돕지 못할 거라고 못 박았다. 친모는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친모는 네이트의 양육에 가족의 도움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안타깝게도 친모의 부모는 모두 지병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나머지 친척들은 미국에 없었다. 네이트의 친모는 친척의 도움을 못 받더라도 미국에 남기로 결심을 했다. 그것이 자신과 네이트를 위한 최선의 판단이라고 믿었다. 네이트의 친부는 아들을 보기 위해 예고 없이 친모를 찾아왔다. 친부는 화가 날 때면 네이트와 친모를 향해 욕설과 함께 주먹을 날렸다. 네이트에게 아버지는 예측할 수 없이 나타나 자신의 몸에 멍을 남기고 사라지는 위협적인 존재였다. 이사를 가도 어떻게 알고 새집에 나타났다. 친모는 통증, 고독, 그리고 육아의 고됨을 잊기 위해 술에 의존했다. 마시는 술의 양은 점점 더 늘어났다. 낮에도 술에 취해 한동안 네이트를 돌보지 못하고 누워있을 때가 많았다.
네이트가 만 2살 무렵, 이웃은 아이가 낮에 진정하지 못하고 우는 소리를 듣고 주(state) 아동보호국에 신고를 했다. 아동보호국 직원이 출동했을 때 네이트의 집에서는 악취가 진동했다. 네이트의 친모는 그의 용변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아동보호국은 친부모로부터 양육권을 이양 받은 후 네이트의 양부모를 찾기 시작했다. 네이트의 친부는 폭행 혐의로 형사 재판을 거쳐 감옥에 가게 되었다. 네이트를 임시로 보육(foster)하고 있던 부부는 그가 만 4살 무렵 정식으로 그를 입양했다. 그들에게는 만 2살 외동딸 카나(Kana)가 이미 있었다.
네이트는 카나와 비교적 잘 지내는 듯 보였다. 네이트는 기분이 좋을 때면 에너지가 넘치는 쾌활한 아이였다. 하지만, 양부모가 자신보다 카나에게 관심을 더 보이는 것 같을 때면 네이트는 조절되지 않는 분노를 표출했다. 카나의 몸에는 멍과 손톱자국이 끊이질 않았다. 네이트의 발길질로 인해 벽에는 구멍이 즐비했다. 하루는 네이트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양어머니를 계단 위에서 밀어 떨어뜨리는 일이 있었다. 양어머니는 계단을 구르다가 머리를 바닥에 부딪혔다. 병원에 가서 상처를 봉합해야 했다. 양부모는 그날 이후부터 안전의 위협을 느끼고 밤마다 카나와 함께 방문을 잠그고 자야했다.
♪ Porter Robinson – Goodbye to a World
네이트는 병동에서 전임의 수련 중이던 나에게 배정되었다. 네이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그 아이의 병실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이는 침대 매트리스와 이불을 이용해 방구석에 자신만의 조그마한 성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조용히 엎드려 있었다. 방안을 자세히 살피기 전까진 네이트가 방에 없는 줄만 알았다.
'성을 쌓고 안에 들어가 있는 걸 보니 지금은 누구와도 말하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다.'
타인과의 단절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그의 비언어적인 표현 같았다. 내가 누군인지를 소개하고 네이트가 쌓아올린 성 옆으로 다가갔다.
“우리 이야기하는 대신 그냥 놀아요!”
네이트는 성에서 불쑥 뛰쳐나와 방 안을 뱅글뱅글 뛰어다녔다. 네이트는 과장스러울 정도로 큰 괴성과도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병실 내 옷장 선반을 밟고 나무 옷장 꼭대기로 올라갔다.
"이제 '바닥은 용암(Floor is Lava)’ 놀이를 시작하는 거에요!"
내가 반응을 하기도 전에 이미 네이트는 놀이를 정하고 시작했다. 나는 다급하게 바닥에서 발을 떼고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네이트는 그런 내 옆으로 뛰어와 나를 강하게 밀기 시작했다. 나를 힘으로 바닥에 밀쳐서 놀이에서 이기려는 계획이었다. 만 5세 아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네이트의 미는 힘은 셌다. 더 이상 놀이라고 하기엔 무리일 정도의 강도였다.
“지금 날 밀치고 싶은 기분으로 가득하구나. 그런 기분을 표현하는 것은 좋아. 그래야 나도 널 잘 알 수 있으니까. 그런데 좀 더 안전한 다른 방식으로 보여줘으면 좋겠다."
이렇게 말하고 방구석에 있는 인형을 대신 밀쳐보라고 손으로 가리키는 순간 네이트는 다시 옷장 선반 위로 뛰어 놀라갔다. 얼굴이 붉어져서 씩씩대고 있었다. 자신의 뜻대로 놀이가 진행되지 않자 화가 폭발했던 것이다. 그렇게 표출된 네이트는 화는 쉽게 사그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네이트는 선반 깊숙한 곳에 손을 넣어 쌓아놓았던 음식을 나를 향해 던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방으로 들어올 때 났던 미묘하게 풍겨오던 악취의 출처를 알게 되었다.
네이트는 식사 시간마다 음식과 간식을 주머니에 챙겨와서 방에 저장했던 것이었다. 간호사들과 보호사들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환자를 돌보고, 세끼 밥이 꼬박꼬박 나오는 입원 병동에서도 네이트는 생존의 위협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언제 필요하게 될지 모를 음식을 비밀스런 공간에 모아주고 있었던 것이다. 안전해 보이는 공간도 네이트에게는 생존을 위한 전장이었다. 네이트는 집에서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 맥락에서 자신을 사랑해주는 가족들도 네이트에게는 때론 큰 위협으로 다가왔으리라.
네이트가 음식을 던지는 행동은 내가 미워서라기보단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을 믿고 친근하게 다가가고 싶으면서도, 가까워진 후에도 결국 버려질 것에 대한 두려움에 불안했던 것이다. 네이트에겐 친근한 관계를 맺는 행위에서도 두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기에 네이트는 무의식적으로 사람들을 밀어냈다. 타인이 자신이 정한 놀이 규칙을 온전히 따르지 않는 모습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부정 당하는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놀이를 좀 더 안전하게 하자고 권유하는 나 또한 그에게는 자신을 내치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당연히 네이트는 (정상적으로 반칙이 난무하는) 또래들과의 놀이를 즐길 수 없었을 것이다. 과거 외상으로 의한 깊은 상흔은 아직 네이트의 행동의 많은 부분 지배하고 있었다. 과거의 외상 경험 이후 네이트의 뇌는 “조그마한 위협에도 격하게 싸우거나 도망쳐”와 같은 지령을 받은 것만 같았다.
정신과 의사 다니엘 시겔(Daniel Siegel)은 뇌의 기본적인 구조를 손바닥을 이용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했다 (그가 처음 이 방법을 사용한 사람은 아닐 수도 있다). 엄지를 손바닥 안으로 접은 상태에서 나머지 4개의 손가락으로 엄지를 감싸보자. 그 상태에서 엄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뇌의 변연계 (Limbic system)가 된다. 그리고 이를 덮은 나머지 손가락이 뇌 피질 (brain cortex)이 된다. 뇌 피질은 추론, 문제 해결, 계획 등 고차원의 인지 기능 (cognitive function)을 담당하기 때문에 ‘인간 뇌(human brain)’라고 불린다. 반면, 변연계는 공포, 기쁨, 슬픔 등 감정을 만들어내고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기능은 인간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변연계를 ‘포유류 뇌(mammalian brain)’라고 부른다. 해부학적인 위치를 보면 변연계가 피질보다 안쪽에 보호되어 있다. 두개골은 그 안쪽에 더 중요한 기관인 뇌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에 위치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변연계는 피질로 둘러싸여, 깊은 곳에 보호되어 있다. 이러한 위치를 통해 생존에 변연계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유추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역경과 같은 외상적 경험은 뇌를 오랜 기간 과도하게 자극시킨다. 이러한 강한 두려움과 공포의 자극은 변연계 중에서도 특히 편도체(amygdala)라 불리는 곳을 자극한다. 편도체는 변연계의 꼬리 쪽 끝에 위치한 아몬드 모양의 구조물이다. 편도체는 위협을 감지하고 놀람과 공포의 감정을 조절하는, 생존에 필수적인 기능을 맡는다. 편도체는 기억을 저장하는 뇌 영역인 해마 (hippocampus) 바로 옆에 위치한다. 강렬한 감정 (특히 극심한 공포)을 느꼈던 순간이 더 생생하게 기억으로 남는 이유는 편도체와 해마가 서로 가까이 있으면서 긴밀하게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다. 편도체는 기억에 감정적 중요성(emotional salience, '현저성'이라고 부르기도 함)이라는 색을 입히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기억을 떠올릴 때 동반되는 감정이 존재하게 된다.
편도체는 뇌의 ‘화재 경보기’라고 이해하면 좋다. 공포를 인지한 편도체는 스트레스에 몸이 더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신호를 보낸다. 결과적으로, 몸에서는 콜티졸(cortisol)과 아드레날린(adrenaline)이 더 많이 분비된다. 어린 시절 반복 되는 학대와 방임과 같은 만성 스트레스 상황에서 변연계는 어떻게 반응하게 될까? 만성적 외상 경험으로 편도체가 과도하게 활성화되어, 일상적인 자극에도 과도한 공포반응을 일으키는 경우를 편도체 납치(amygdala hijacking) 현상이라고 부른다.
편도체 납치 상황에서는 저장된 기억은 향후 ‘경보기 시스템 오류’를 자주 일으킨다. 외상 경험과 완전히 동일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조금이라도 유사한 상황이 극단적인 감정 반응 (폭발하거나 완전히 굳어버리는)을 촉발하게 된다. 악의가 없는 말이나 아주 조그만 얼굴 표정의 변화도, 과거 스트레스 상황에서 느꼈던 강한 감정과 온몸이 보내오는 불편한 신호를 느낄 수 있다. 실제로 위협이 부재한 상황에서도 과도한 공포 반응을 느낄 수 있다. 변연계가 과활성 되지 않은 안전한 환경에서 뇌 피질이 고위 인지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다. 즉, 편도체 납치 상황에서는 (뇌 피질을 통한) 차분하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하다.
뇌는 사용 의존적(use-dependent) 방식으로 변화해 간다. 어린아이의 뇌는 특히 더 그렇다. 주변 환경과의 상호작용에서 뇌의 어떤 영역이 더 활성화되는지에 따라 어린아이의 뇌는 분명 다르게 발달해 간다. 양육자와의 관계에서 안전하고 사랑받는다고 느낀 아이의 뇌는 탐험, 협력, 놀이에 특화된다. 변연계는 공포 자극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방향으로 발달해서, 아이는 두려움에 압도되지 않고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반면, 어린 시절 만성적인 역경을 경험한 아이들의 뇌는 다른 운명을 거친다. 이 경우, 아이들은 양육자로부터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얼굴을 충분히 마주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이들은 자신의 감정이 부모의 얼굴에 어떤 표정을 띠우게 하는지를 경험할 기회를 잃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자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의미 있는 대상(object)이 되는 경험을 박탈당한다. 관심과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인생초기의 안전한 의존 경험은 뇌 발달에 필수적이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