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4절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것은 한 세대에서 해결하기엔 너무 큰 외상의 조각이었다.” - 마크 월린
"당신의 고통은 당신에게서 시작되지 않았더라도, 당신이 끝낼 수 있다.” - 스테파니 허친스
“어린이집의 유령들(Ghosts in the Nursery)”은 1975년에 정신분석가 셀마 프레이버그(Selma Fraiberg)와 그녀의 동료 정신치료사들(에드나 아델슨, 비비안 샤피로)이 함께 쓴 논문이다. 이 논문은 내가 CHA병원에서 소아정신과 수련을 받으며, 보스턴 정신분석학회(BPSI)에서 정신치료 수련을 병행하는 2년 동안 가장 많이 읽고 동료들과 토론했던 글이다.
논문에는 두 명의 영아와 그들의 어머니 사례가 나온다. 이 어머니들은 아이에게 친근함을 느끼지 못해 고통받고 있었다. 저자들은 어머니들이 이러한 경험을 하게 된 배경을 탐구했는데, 그 배경에는 양육자들의 어린 시절 외상 경험이 있었다. 양육자들이 의식적으로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행동으로 나타나는 (혹은 “발현될 수밖에 없는”) 외상의 영향력을 저자들은 "유령"이라고 불렀다. 논문은 이러한 원인을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유령"을 어떻게 정신분석적 이론에 기반하여 치료할지에 대한 제언도 포함하고 있다.
심리적 외상이 여러 세대를 거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이 글만큼 잘 표현한 글은 드물다. 이 논문은 출판된 지 50년이 되었지만, 읽을 때마다 새로운 깨달음을 준다. 소아 정신과 분야에서는 필독서로 여겨지지만, 놀랍게도 한국과 미국에서 성인 정신과 전공의 수련 7년 동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다. 이 글의 사회적 중요성을 고려할 때, 정신 건강 전문가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꼭 한 번은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논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임상 사례들 중 하나를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은 꼭 영어 원문 전체를 읽어보길 권한다.
♪ Jan Garbarek Group – Mission: To be Where I Am
그렉(Greg)은 생후 4개월 된 남자아이였다. 그의 친모인 애니(Annie)는 16살이었다. 병원에 의뢰가 들어온 이유는 애니가 신생아인 그렉을 돌보는 일을 멈췄기 때문이었다. 애니는 그렉과 물리적으로 접촉하기를 피했다. 엄마가 아이를 만지거나 안아주지 못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애니는 그렉에게 모유나 우유 대신 주스(원문에서는 Kool-aid)를 먹였다. 이런 상황에서 19세인 그렉의 친부인 얼(Earl)이 주양육자가 되었다. 그렉에게는 특별한 유전적 이상이나 발달 지연은 없었다.
애니는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그녀는 9살 때 이미 집안 청소와 요리를 전담했고, 다른 남매들을 돌봐야 했다. 애니의 계부는 매일 술을 마셨다. 애니가 집안일을 빼먹거나 작은 실수를 하면 나무 막대기로 그녀를 내려쳤다. 벌로 집 밖으로 쫓겨나거나 머리를 짧게 잘리는 일이 빈번했다. 애니는 벌이 끝날 때마다 냉소적인 웃음을 지었다.
애니의 친부는 애니가 5살 때 사망했다. 친부는 비교적 합리적인 사람이었고, 애니에게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애니의 친모는 남편이 사망한 후 4명의 다른 남자들 사이에서 6명의 아이를 가졌다. 애니는 친모뿐만 아니라, 이복형제자매의 아버지들 누구도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그들은 아무도 나를 원하지 않았어요.”
애니의 어머니는 일을 하느라 집을 자주 비웠다. 그래서 애니는 어머니가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 돌봄을 받았다. 애니는 이런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도, 자신이 엄청난 고통과 괴로움을 견디며 자랐다는 것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런 환경에서 자라난 건 정말 끔찍했을 것 같네요.”
정신치료사의 이러한 반응에 애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역경을 더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를 치료진의 도움으로 반추할수록, 애니는 자신의 아이인 그렉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움터났다.
하지만 애니는 치료진과 몇 번 만난 후, 한동안 약속한 치료 회기에 나타나지 않았다. 애니는 자신의 과거를 더 이상 들여다보는 것을 주저했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수록, 무의식 속에 잊혔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기 때문이다. 표현되지 않고 언어화되지 않은 감정들은 어둠 속에서 더 크게 자라난다. 이렇게 커진 어린 시절의 감정이 떠오르면서 애니는 회피 반응을 보인 것이다. 또한, 애니는 어린 시절 경험으로부터 "아무도 자신을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대상 표상(object representation)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치료진도 결국 자신을 내칠 것이라고 믿게 된 것이다. 애니가 치료 회기에 나타나지 않고 회피하는 것은 일종의 자기 보호의 기전이었다. 자신이 버려지기 전에 먼저 자신이 능동적으로 치료진을 내치면서 삶의 주체성(sense of agency)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이런 회피 반응의 결과를 증거 삼아 애니의 대상 표상은 다음과 같이 더욱 공고해졌다.
‘사람들은 정말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나를 버리고 사라져 버리지.’
치료진은 애니의 행동에서 그녀의 대상 표상이 나타날 때 압박을 느꼈다. 실제로 치료를 중단하고 그녀와 그렉을 포기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었다. 하지만 치료진은 이런 역동을 감지하고, 오히려 애니가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환자임을 명확히 했다. 이 무렵 그렉은 집에서 더 방치되었다. 반복되는 상기도 감염에도 애니와 얼은 그렉을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 치료진은 아동보호 서비스(Child Protection Service; CPS)에 애니를 신고할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던 중 애니는 다행히 치료진 앞에 다시 나타났다. 애니는 과거를 들여다볼수록 치미는 분노(anger)를 주체할 수 없었다고 했다. 분노는 살의(murderous impulse)로 이어졌다. 자신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죽이고 싶은 생각들. 이런 수준의 화를 느끼게 하는 상황에서 애니는 줄곧 도망쳤다. 분노는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슬픔과 공포를 자아냈다. 그런 감정에 압도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고통받았음을 부정하거나 망각하는 것이 더 편했다. 애니는 이런 회피를 주된 생존 기전으로 삼아 세상을 살았다.
‘내가 겪은 일들에 대해 말하는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이제까지 모든 걸 혼자 감당해 왔는걸. 차라리 잊고 생각하지 않는 게 편하지.’
하지만 잊으려는 노력만으로는 감정이나 기억을 사라지게 할 수 없었다. 치료 초반, 애니는 자신이 누구에게 화가 나 있는지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치료진과 점차 자신의 감정을 나누면서, 애니는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애니는 자신의 분노를 점차 명확히 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다. 분노가 말로 표현되면서 애니는 더 이상 분노라는 감정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애니가 분노를 표출하는 동안, 치료진은 이야기를 경청하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애니는 자신이 분노를 표출해도 치료진(타인 또는 대상[object])이 자신을 버리거나 복수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했다.
“어린 시절 얼마나 무서웠을까요. 당신은 그때 어린아이였어요. 그런데 당신을 보호해 줄 사람이 없었어요. 모든 아이들은 돌봄과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어요. 기억하기 고통스럽더라도, 이런 기억을 받아들이면서 당신이 원하는 엄마가 되는 길을 함께 찾아가요.”
애니는 의도하지 않게 어린 시절 자신을 방치했던 양육자들과 자신을 동일시(identify)했다. 무의식적으로 애니는 아이에게 해를 가했던 자신의 어머니와 계부의 모습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런 반복을 통해 애니의 어린 시절은 ‘수정이 필요 없는 별 문제없었던 어린 시절’이 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애니는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두려움에 떨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녀는 자신의 아이를 안을 수 없었다.
“내 아이가 나를 무서워하길 원치 않아요. 그리고 아무도 내가 받은 것과 같은 상처를 내 아이에게 남길 순 없을 거예요.”
치료가 진행되면서 애니는 자발적으로 그렉에게 다가갔고, 아이를 자신의 품에서 안을 수 있었다. 애니의 어린 시절의 "유령"은 그렇게 사라졌다.
부모가 어린 시절 학대와 방임을 경험했어도, 자신의 아이에게는 상처 주는 행동을 반복하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모는 어린 시절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이미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크다. 부모가 욕을 하며 자신을 때렸을 때 얼마나 공포스러웠는지, 부모가 홧김에 자신을 집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잠겄을 때 얼마나 두려웠었는지를 말이다.
반대로 애니처럼 부모가 되어서 무의식적으로 (즉, 의도하지 않게) 아이에게 자신이 받았던 학대와 방임을 반복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부모는 어린 시절에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비교적 잘 기억할지라도, 그와 연관된 공포와 무기력감 등의 감정은 잊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인간의 뇌가 생존을 위한 방어기전인 억압(repression)과 감정의 고립(isolation of affect)을 이용했을 때 오는 결과이다. 부모는 아이를 공감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어린아이는 결과적으로 감정의 결핍을 경험하며 자라나게 된다. 어린아이는 가족 전체가 쓴 비극을 연기하게 되는 셈이다.
세대를 거쳐 내려오는 외상의 고리(chain)를 끊으려면, 자신의 고난 이야기를 안전한 환경에서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의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양육자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해야 자녀를 ‘버릇없는’ 혹은 ‘앙심을 품은’ 아이가 아닌, 어린 나이에 상응하는 연약한 존재로 대할 수 있게 된다.
앞에서 외상에 의해 생화학적으로 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후성유전학(epigenetics) 차원에서 설명했다. 놀랍게도 이렇게 DNA 염기 서열 밖에서 일어나는 후성유전학적 변화도 다음 세대로 전달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들이 보고되고 있다. 예를 들어, 메틸기(methyl group)가 어디에 달라붙는지, 히스톤(histone)이 염색체의 어느 부분을 느슨하게 만드는지와 같은 DNA 암호 외의 정보도 세대를 뛰어넘어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외상이 여러 세대에 걸쳐 인간의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물학적인 증거들이 점점 더 쌓이고 있다. 즉, 앞의 사례에서 애니의 어린 시절 역경이 어떻게 세대를 거쳐 그렉의 방임으로 이어지게 되었는지가 정신분석 이론뿐 아니라 생물학적으로도 설명이 가능해진 것이다.
뉴욕 대학(New York University)의 모리아 토마슨(Moriah Thomason) 박사 연구팀은 휴식 상태 기능적 MRI(resting-state functional MRI)를 사용하여 태아의 뇌 연결성을 연구했다. 이 MRI 기술은 특별한 지령을 수행하고 않는 (멍한 상태의) 사람의 뇌에서 부위별 혈류(blood flow)의 차이를 분석한다. 일반적으로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뇌의 부위는 혈류량과 산소 소모량이 많음을 이용하는 시각화 기술이다. 어린 시절 외상을 경험한 어머니의 태아는 편도체(amygdala)와 전두엽 피질(frontal cortex)을 포함하는 부위들에서 이미 활성도 차이를 보였다. 이런 뇌 연결성의 차이를 보인 아이들은 위협을 더 민감에 감지했고, 불안 장애를 동반하는 경향을 보였다.
시리아(Syria) 가족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도 있다. 이 연구에서는 48개의 시리아 가족들의 DNA를 3세대에 걸쳐 분석했다. 놀랍게도 할머니가 폭력에 노출된 경우, 그 외상의 상흔이 손자 세대에서 후성유전학적 변화로 나타났다. DNA 염기 서열 자체가 외상으로 변화한 것이 아니라, 유전자의 구조와 기능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생화학적 결과물이 여러 세대를 걸쳐 내려온 것이다.
또 다른 연구는 어린 시절 큰 역경을 경험한 아버지들의 정자(sperm)에서 이미 특징적인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나타남을 밝혔다. 정자에서 이러한 변화를 발견하지 못했으면, 자손에서 발견되는 후성유전학적의 변화는 단순히 다음 세대가 경험하는 독립적인 스트레스 상황에 의한 것으로 치부되었을지도 모른다. 현재까지의 과학적 증거를 종합해 보면, 인간 사이에서 극심한 갈등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비(非) DNA 유전 암호를 통해 세대를 관통하는 흔적을 가족에 남기게 된다.
(나머지 내용은 오프라인 서적으로 곧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