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기만의 훈련을 찾아서 행해야 한다는 말
꽤 오랜 시간 나는 많은 양의 정보를 단시간에 파악해서 일을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눈치가 빨라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할 일이 떠오르면 빠르게 처리하는 편이었다.
그런데 사람이 특정 능력에 대해 칭찬을 받거나 본인도 잘하는 것 같다고 느끼면 그것에 함몰되기 쉬운 것 같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더 빨리 일처리를 하려고 했고 모르는 분야가 있으면 다독, 속독으로 짧은 시간 안에 파악해서 현장에 적용하는 습관이 가속화되었다. 그것이 일을 잘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문제의 난이도가 올라가면서였다.
다니던 회사를 나와 자영업 시작하고 다시 공부하러 대학원에 가서였다.
한눈에 보이는 건커녕 내 위치 파악도 안 되고 그림이 그려지지 않는 것들이 투성이었다. 속도와 (당시 내가 생각한) 일잘러 모드에 집중한 사이 생겨버린 약점이 이때 드러났다. 해결해야 할 과제가 복잡하고 한눈에 안 들어오면 속도가 안 나니까 답답하고 불편해서 피하고 미루는 버릇이 생긴 것이다. '빠릿빠릿함', 그것이 내가 사회생활 초반에 내세웠던 특기였지만 쉬운 문제에만 머물고 싶게 한 원인이 되어버린 거다.
생각보다 큰 문제였다.
자존감이 떨어졌고 위축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생각했던 유능감이 '속도'와 '능숙함'이었기 때문이다. 연구는 새로운 문제를 풀어야 하기 때문에 로드맵이 당연히 없고, 자영업 역시 영양상담을 한 사례가 앞서 없었으니 모두 처음 풀어야 하는 낯선 문제인데 어떻게 빨리 능숙하게 하겠는가.
지금 생각하면 참 짧은 생각인데 그땐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든지 파악조차 못해서 불안감만 점점 올라갔다.
세상에 안 풀리는 문제 천지고, 안 풀리는 걸 풀려면 풀 때까지 매달려야 하니까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한데, 그걸 무능함으로 잘못 연결 지으면서 악순환의 고리에 들어간 것이다.
사실은 이제야 성장할 수 있는 도전 과제를 받은 것이었다.
예능 중에 일타강사 정승제 선생님과 조정식 선생님이 공부 습관 개선하는 '티처스'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거기 사례 중 한 학생이 본인이 아는 문제는 풀고 빨리 안 풀리는 문제는 뒤로 미뤘다가 틀리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친구를 보면서 내 생각이 났다.
"이건 실력을 기르는 게 아니라 공부를 안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말을 들으니까 지난 몇 년간 내가 겪고 있었던 문제와 원인이 구조화되고 이해 됐다.
프로그램에서 두 선생님이 자주 이야기하는 것이 '사고력'이다.
사고력을 키운다는 건 문제를 많이 푸는 게 아니라 안 풀리는 문제를 붙잡고 늘어져보면서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능력인데 우리는 자꾸 되든 안되든 빨리빨리를 종용한다. 수능도 결국 사고력으로 풀어야 하는데 연습할 때 문제에 매달려봐야지 속도부터 내면 진짜 문제를 안 풀어본 사람이 어떻게 본인을 믿겠냐는 거다.
이번 대학원 연구 과정에서 다시 배운 건 풀리지 않는 것을 붙잡고 늘어지며 사고해 보는 것이었다. 하루에 체크리스트 10개를 쳐내는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문제 2개를 가지고 씨름해 보는 것. 그것이 여유 부리거나 노는 것이 아닌, 무능력한 것도 아닌 어쩌면 진짜 문제에 도전하고 있는 과정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많이 읽기만 하면 읽는 행위에 중독된다. 읽기만 하면 읽을거리는 많지만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았다. 중요한 것은 오늘 읽은 한쪽에서 나온 내용을 가지고 곱씹고 음미해 본 다음 나만의 결론을 내보는 것이 책이 가지는 진정한 의미라는 걸 뒤늦게 이해했다. 책이 나에게 던진 질문을 생각하고 답해보고, 실천해 봤을 때 나를 성장시켜 준다는 것을 말이다.
많은 직업군에서 형식은 달라도 맥락은 동일한 '훈련 일지'를 쓴다.
연기노트 (배우)
연구노트 (연구자)
오답노트 (학생, 수능)
사고 훈련 노트 (철학가)
철학가 별 사고 훈련법 - https://brunch.co.kr/@haminmom/208
운동하는 철학자 - https://m.blog.naver.com/netbar/221443190154
P.G. 해머튼이 쓴 책 '지적 즐거움'에서 이런 말이 나온다.
독창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자기만의 훈련을 찾아야 한다.
훈련일지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실천하고, 복기하고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면 무엇이 힘들었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그에 대해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를 고민하며 매일을 살아가는 가장 상식적이고 생산적인 방식 같다. 너무 당연한 건데 이걸 왜 지금 알았을까.
지금까지는 감정일기로 매일을 기록했는데 이젠 훈련을 더 기록해보고 싶어졌다.
우린 모두 각자의 무언가를 훈련하며 능숙해지고 싶어 하니 자기만의 훈련을 세우고 적용해 보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실천한 매일 끝에 이루어질 다음 도약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