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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Dec 16. 2018

스마트폰 너머의 죽음

하청노동자의 죽음은 언제까지 기억될까


오늘도 스마트폰으로 아침을 시작했다. 따뜻한 온수매트의 기운을 느끼며 눈을 뜨고 메신저에 쌓인 메시지 확인, 다음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의 SNS 차례, 모두 거치고 나면 습관적으로 포털 뉴스창을 연다. 아이템 거리 없나 눈을 굴리다 보니 배터리가 52%. 이쯤 되면 불안하다. 침대 밖으로 나와 온수매트를 끄고 충전기에 폰을 꽂았다. 냉장고를 열고 냉수를 꺼내 마신다. 컴퓨터를 켜고 멍하니 책상머리를 바라본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의 시작이다. 전기로 시작해 전기로 끝나는 또 다른 하루.


이 전기는 어디서 왔을까. 조금 찾아보니 발전소에서 변전소 몇 군데를 거쳐 건물까지 도달한다고 한다. 전기에 식재료마냥 원산지가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쓰는 전기가 고리 원자력 발전소에서 만든 것인지,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만든 것인지 알 방법은 없다. 다만 하청노동자 故김용균씨가 끼여 사망한 컨베이어벨트, 그의 시신을 담아 옮겼다는 석탄 수레 덕분에 만들어진 전기도 아마 섞여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나의 일상을 맴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죽음과 고통은 사방에 널려있다. 퇴근 후 나를 반겨주는 택배상자, 그 송장에는 택배기사가 하루에 15시간씩 일하고 한 건당 800원도 채 되지 않는 수수료를 받는다는 사실과 택배 물류센터에서 감전사한 알바노동자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편의점에서 1,000원도 되지 않는 생수 한 병. 그 라벨에는 원산지가 제주도라는 정보가 있지만, 제주도 음료수 공장에서 프레스에 깔려 사망한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의 비극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모두 우리에게 ‘석탄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석탄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좀처럼, 또는 전혀 떠올리지 못한다. 우리가 영국 북부에서 차를 몰고 가며 도로 밑 수백 미터 지하에서 광부들이 석탄을 캐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너무 쉽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당신의 차를 모는 것은 그 광부들인 것이다. 꽃에 뿌리가 필요하듯, 위의 볕 좋은 세상이 있으려면 그 아래 램프 빛 희미한 세상이 필요한 것이다.

- 조지 오웰 <위건 부두로 가는 길> 48p


실로 망각은 축복이다. 죽음과 고통으로 점철된 일상을 맨 정신으로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전기를 쓸 때마다 발전소 하청노동자를, 물을 마실 때마다 특성화고 현장실습생을, 택배가 올 때마다 감전된 알바생을 떠올린다면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 그 축복도 결국 ‘볕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만 누리는 것이 아닌가. 여전히 '일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발전소로, 음료수 공장으로, 택배 물류센터로, 한 겨울의 건설현장으로 나가고 있는 이들에 망각이란 축복은 불가능하다.


죄책감에 휩싸인 채
같이 괴로워하자는 것이 아니다.


같이 잊고 같이 살기 위해서라도, 반복되는 비극을 끊어내자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나간 노동자들의 역사만큼, 그 해답 또한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기업이 사람 귀한 줄 알게 만들자.



기업살인처벌법은 여전히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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