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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Jul 30. 2019

트레바리 다녀온 반성문

이불킥 직전에 이유를 찾았다

* NOT ALL MEN 사절 


지난 토요일, 도란스의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를 읽는 트레바리 모임에 다녀왔다. 가기 전에 우연찮게 권김현영쌤을 만나 책에 싸인까지 받는 영광의 시간을 가졌기에 발걸음은 가벼웠다. 게다가 트레바리에서 가장 유서 깊은 모임이라는 GD(젠더이슈), 그것도 심화클럽이라니, 기대가 클 만도 했다. 


그런데 여차저차 4시간여의 토론을 마치고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던 찝찝함이 있었다. 토론 과정에서 내가 뭔가 잘못한 거 같은데, 그 잘못이 무엇인지 손에 잡히지 않는 답답함이었다. 역시나 시간은 약이었는지, 오늘 수영장에 다녀오는 길에 뭐가 문제였는지 깨달았다.




한창 남성성의 문제적인 지점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던 중이었다. 현실 통계를 무시하고 자기연민에 여념이 없다거나, 여성에 대한 폭력을 너무 쉽게 휘두르고, 여성을 섹스의 대상이나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지 않고서는 못 배기고 등등. 누군가 “왜 그럴까요?”라는 질문을 던졌다. 맥락상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에서 펼쳐놓은 식민지 남성성에 대한 분석을 공유해보자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남성들이 그런 행동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이야기해보자는 뜻으로 들렸다. 


나는 깊게 생각하지 않고 “굳이 그걸 더 구체적으로 이해해야 할까요?”라고 말했다. 이 곤란함이나 한심함의 문제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어떻게 다룰 것인지’가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가장 고민했던 부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참여자들 중에 한두 분이 말을 더 붙였다. 그러다가 다른 한 분이 “이 부분을 그냥 이해할 필요 없다고 넘기기에는 중요한 질문 같다”고 얘기하셨고 진행자도 “실제로 남성의 폭력에 의해 피해를 보는 여성들이 많은 상황에서 짚어볼 문제인 것 같다”고 동의를 표했다.


여기서 내가 지난 이틀 동안 찝찝하게 된 상황이 발생했다. 그 두 분은 아마도 집단으로서 지금의 한국 남성들이 공유하는 문제가 있다면, 그게 발생하는 구조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뭐라도 바꿀 수 있으니 얘기를 해보자는 의도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그 질문을 문제적인 개인 남성이 왜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가, 라는 식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폭력의 가해자를 너무 세세하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오히려 그들에게 서사를 부여해주고, 가해자에게는 해석의 대상이 될 기회를 주면서 피해자는 묻어버리는 어쩌고저쩌고 요즘 언론들이 그래서 참 문제고 어쩌고 이런 얘기를 했다. 완전히 프레임이 바뀌는 방식의 답이었는데, 내가 얘기한 문제는 또 그것대로 문제이기에 자연스럽게 앞의 질문에 대해 더 이야기하는 사람은 없었고, 대화의 방향은 다른 쪽으로 흘러가버렸다. 


제대로 된 토론이 이어졌다면 우리 사회에서 남성들에게 권장되는, 혹은 용인되는 가치와 행동규범(폭력에는 관대한, 공감과 관계 맺기에 미숙한), 그리고 실제로 군대를 비롯해 남성 집단 안에 통용되는 지배적인 규범(서열과 폭력), 여기에 여성혐오의 온상이 된 커뮤니티 등등의 사례들이 나왔어야 하지 않나 싶다(최태섭 <한국, 남자> 참고). 하지만 이렇게 황당한 방식으로 논의의 흐름이 꼬여버린 상황을 다시 교통정리 할 경황이 당시에는 누구에게도 없었던 것 같다.


아무튼, 이건 내 잘못이기도 한데 ㅠㅠ 트레바리라는, 그리고 GD심화라는 클럽이 어떤 곳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기도 하다. 




트레바리는 한 달에 한번, 한 권의 책을 읽고 평균 15명 가량의 사람이 모여서 4시간가량 토론을 한다. 20대를 거진 캠퍼스에서 보내며 책모임이나 세미나는 정말 지겹도록 해본 경험을 돌아보면, 세미나는 인원으로는 7명, 시간으로는 두 시간 넘어가는 순간부터 힘들다. 시간은 집중력의 문제고 사람 수는 논의의 수준 문제다. 사람이 많으면 구성원의 기대도 지향도 다르고 공유하는 인식의 지반도 많이 달라진다. 그래서 논의가 쌓이면서 상승하고 함께 벽을 뚫고 나간다기 보다는 각자 할 말 잘하고, 얻는 질문도 결론도 각자 다르기가 쉽다. 


이걸 트레바리 운영진들이 모를 리가 없다. 다만 트레바리는 책모임을 표방하면서도 근본적으로는 인맥+커뮤니티 서비스이기에 여기서 인원을 더 줄이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15명 정도가 한 달에 한번 겨우 만나서 두 시간 얘기하면 쉴 새 없이 오디오가 채워진다고 해도 한 명당 얘기할 수 있는 시간은 10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래서 트레바리가 규칙으로 정해놓은 ‘4시간’이라는 시간은 바꾸기도 참 애매하다.


그리고 GD 심화라는 클럽의 특성. 애초에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를 읽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다루는 책들이 상당히 ‘어렵다’. 커리를 보니 지난달에는 <성의 변증법>이었고 다음 달은 <시스터 아웃사이더>다. 저 책들에 비하면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는 좀 더 구체적으로 와 닿는 내용일 수 있지만 아무튼, 이 책을 15명이 각자 읽고 와서 4시간 동안 이야기한다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이 책으로 사적인 세미나를 구성한다면 꼭지 2개를 골라 2시간 정도씩 나눠서 세 번에 걸쳐 할 것이다)


토론의 전반부 상당시간이 식민지 남성성이라는 개념에 대한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데 쓰였는데, 그렇게 오간 대화를 아예 이 책을 안 읽은 사람이 들었다면 저 개념을 1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게 왜 중요하냐면 <한국 남성을 분석한다>의 첫 글에 담긴 핵심개념에 대한 공통의 이해지반이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만들어졌다 하더라도 굉장히 성긴 수준이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를 또 생각해봤는데, 흔히 철학 세미나를 하던 방식처럼, 발제자가 반쯤은 강의를 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각종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쉽게 설명할 수 있도록 발제문을 구성하기를 강요했을(?) 것이다. 


아무튼, 사람이 많고 또 각자 독후감을 통해 각자의 버튼 눌리는 지점들을 펼쳐놓은데다 평등한 발언권이 어느 정도는 보장되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렇게 고급(?) 담론을 압축적으로 모아놓은 책을 읽는 것이 맞는가, 라는 의문이 든다. 나로서도 참 아쉬운 게, 클럽에 딱 갔을 때 예상보다 남자가 많아서 이 책에 실린 엄기호쌤의 글, 그러니까 자기피해자화에 여념 없는 남성과 페미니즘을 자신의 언어로 내세운 남성들의 전략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글을 두고 꽤 풍성한 이야기가 펼쳐질 수도 있겠구나 싶었는데 그 얘긴 4시간 동안 1도 못했다. (내가 이 이야기 하려고 이동진의 '캐롤' 평에 대한 그 길디 긴, 그래서 그 길이만으로도 이게 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블로그 해명글도 다시 읽고 갔는데..)


흥미롭게도 4시간여의 클럽 토론에서 1도 언급이 없었던 바로 그 엄기호쌤의 글이, 그 4시간을 복기하며 가장 명징하게 떠오른 글이기도 했다.




암튼, 반성문에서 시작해서 트레바리 후기 스포일러까지 이어졌는데, 아직 트레바리 멤버십은 한 달 남았다. 이번 GD심화는 놀러가기(다른 클럽 멤버가 독후감과 일정 금액을 내면 참여할 수 있는 방식)로 간 거였고, 내가 몸담고 있는 클럽은 그 이름부터 매혹적인 ‘음주입문’이다. 진짜 후기는 멤버십이 끝나는 8월에....ㅋㅋ 


덧 - GD심화에 대해 부정적인 뉘앙스의 이야기만 한 것 같은데 나쁜 분위기는 절대 아니었고, 그냥 나랑 안 맞았다는 뜻이다. 당일 토론에서 내가 느꼈던 아쉬움에는 내가 저지른 잘못에서 기인한 것도 있었고.. ㅠㅠ 트레바리에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최고의 클럽이 될 수도 있겠다는 걸 그날 자리에서 느꼈다. 실제로 최고의 클럽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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