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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어쩌다 PD Mar 21. 2020

설렘이고 다행이었던 660일

굿바이 시사자키


2017년 12월 22일 CBS 공개채용 최종면접, PD가 된다면 하고 싶은 프로그램 세 가지가 뭐냐는 질문을 들었다. 


제가 가장 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합격, 교육, 수습기간을 지나 2018년 6월 1일 시사자키 팀에 배정됐다. 그 뒤로 오늘까지 딱 660일 동안 나는 시사자키 제작진이었다. 




생판 오디오 콘텐츠라고는 만들어본 적 없는 초짜로 들어와 섭외, 원고작성, 코너기획/구성, 프로그램 진행, 녹음/편집 등등 시사라디오PD가 하는 일을 하나부터 열까지 배웠다. 아, 나는 참 좋은 사람들과 함께 일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생각하는 날도, 오늘 방송 뭐하지가 두려움이나 지겨움이 아닌 설렘일 수 있었던 날들도 많았다.


다른 시사프로그램에 비해 시사자키가 갖는 차별성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을(乙)의 목소리를 얼마나 담아내느냐, 그리고 이슈를 조망하는 높이가 어디이냐, 정도라고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정치인들 말싸움이나 대형 사회이슈를 다루는 건 물론이었고 관심은 덜해도 중요한, 예컨대 인권/노동/환경/문화 이슈 역시 꾸준히 담아냈다. 그래도 항상 아쉬울 수밖에 없지만, 데일리 시사라디오가 짊어지고 있는 무게와 관성을 감안하면 꽤나 다채로운 목소리를 전파에 실어 보낼 수 있어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코너들이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가장 오래 해온 코너는 2018년 가을부터 맡았던 금요살롱, 라디오에서 나가는 사회문화비평 중에 독보적이지 않을까(애초에 이런 코너는 타방송에 거의 없기도 하다)라고 생각하며 만들었다. 정말 기초적인 수준의 밑그림만 그려두고 패널들이 어떤 색깔로 채워주실지 두근두근 기대하는 묘미가 있는 코너였다. 



2019년 봄부터 맡았던 빅브라더의 민심, 대부분의 시사라디오 방송에 여론조사 코너는 있지만 빅데이터와 함께 입체적으로 분석하는 경우는 없다. 만들면서 가지고 있던 원칙은 그냥 휘발성 있는 소재를 잡아 하루 클릭장사 벌이는 식으로 여론조사나 빅데이터를 활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매주 아이템 잡는 게 좀 빡세기는 했지만 이렇게 숫자를 다루는 코너에선 빡빡하더라도 원칙을 지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마찬가지로 2019년 봄에 기획해서 런칭하고 초반 3개월 정도를 맡았던 백투더컬쳐. 대중문화/연예계 이슈를 시사자키에 녹여내고 싶었는데 솔직히 정통시사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에서 얼마나 갈 수 있을지 우려가 되긴 했다. 그런데 장장 10개월을 했다. 담당해주신 작가님과 두 패널분 덕분에 여느 시사프로그램에 있는 대중문화/연예계 이슈 코너들과는 차별성 있는 깊이와 메시지를 담아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2018년 11월부터 2달간 매주, 그 이후에는 비정기적으로 편성했던 갑질타파. 직장갑질119와 함께 만드는 방송이었다. 무슨 말이 필요할까. 노동문제에 대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 할 수 있었던 코너였다. 역시 다른 시사프로그램에도 유사한 코너가 죄다 있었지만 아마 우리처럼 PD의 참여도가 높은 방송은 없었을 것이다. 덕분에 나의 노동시간은 매우 길었지만(?) 구성이나 방송의 흐름, 메시지에 있어 차별성을 가질 수 있지 않았나 싶다. 올해는 이 갑질타파의 기운을 이어받아 산재타파라는 코너를 기획해서 진행했는데 봄개편으로 아쉽게도 목표했던 10회 방송은 못하고 5회로 막을 내렸다. 



내가 전담한 건 아니었지만 기억하고 싶은 코너로는 ‘계류법안 심폐소생’이라는 게 있다.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계류돼있는 의미있는 법안들을 발의한 의원이 직접 나와서 소개하는 코너다. 2018년 11월부터 편성돼서 총 50번을 했다. 취지가 비슷한 법안은 묶어서 다룬 적도 있으니 최소 50개 이상의 법안이 다뤄진 셈이다. 국회의원은 그저 말싸움하고 자기 이권만 챙기는 집단이 아니라 국민의 뜻을 모아 입법을 담당하는 헌법기관이다. 그래서 우리는 유권자로서 국회의원들을 잘 ‘써먹을’ 방법을 궁리하는 것이, 아이고 저 놈들 다 똑같지 쯧쯧 그냥 확 줄여버려, 라며 정치혐오에 빠지는 것보다 이득이라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 진짜 일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참 좋았다.



그리고 정기적인 코너는 아니었지만 시사자키는 꾸준히 좋은 보도를 낸 펜기자들을 초대하거나 기자들의 출연이 어려울 경우에는 관련 당사자/전문가를 초대해 이슈파이팅을 해왔다. 텔레그램n번방 사건 역시 최초의 한겨레 보도 직후에 다뤘고, 에스더 가짜뉴스나 한국의 요양실태, 청년이 100명이라면(이상 한겨레), 하루에 3명씩 산재로 사망한다는 참담한 현실을 감각적으로 보여줬던 고 김용균 1주기의 산재특집과 디지털 막노동(경향신문), 타워팰리스 거주자들의 쪽방촌 비즈니스와 오피스텔 성매매(한국일보), 간병살인(서울신문) 등 사회부가 강한 신문의 기자들은 종종 시사자키 스튜디오를 찾았다.




써내려가다보면 끝이 없겠다. PD로 일하면 1~2년에 한번씩 프로그램을 이동하는 일이 반복될텐데 아무래도 첫 프로그램이었다보니, 그리고 내가 라디오PD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들게 해준 프로그램이었다보니 애착이 많이 갔다. 


매일 하루가 아름다웠고 행복했다 할 수는 없지만
660일을 돌아본다면, 정말 시사자키 PD여서 좋았다

무엇보다 시사자키PD였기에 만날 수 있었던, 

매일/매주 함께 서로를 북돋아가면 일했던 분들,

그리고 방송에서 기꺼이 목소리를 내주셨던 많은 분들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뽀...뽀에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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