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본 영화는 장편 23편, 단편 2편. 영화관에서 본 작품은 8편.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를 통해 접한 기존 작품들이 많다. 작년과 비교하면 반 토막. 코로나19 때문에 못 돌아다니기도 했지만 팀이 바뀌면서 1주일에 영화 한 편 챙겨볼 여유조차 사라진 것도 큰 이유다.
올해 본 최고의 영화는 두말 할 것 없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시선과 대화 속에 오가는 권력과 감정에 대해 이렇게 밀도 있게, 또 신선하게 그릴 수 있을까. 셀린 시아마라는 감독을 알게 된 것도 큰 수확. <작은 아씨들>은 누구 한 캐릭터 하나 버릴 것 없이 소중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1917>은 <덩케르크>와는 다른 방식으로, 하지만 비슷한 감각으로 나를 전쟁터 한복판에 내던졌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숨막히게 감싸오는 눈빛과 잊을 수 없는 속삭임
작은 아씨들 / 한 사람 한 사람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소중하다
1917 / 사방이 죽음인데도, 죽음이라서, 뛰어들어 달리는 마음
올해 팟캐스트를 만들면서 잡은 캐릭터 중에 하나가 ‘성장덕후’인데 원래 성장서사를 좋아하기도 하고(오죽하면 대학 때 과를 교육학과로 전과하고 대학원까지 갔을까?), 쉽게 버튼이 눌린다. 아이들의 세계에 존재하는 거칠지만 말랑말랑한 감정을 잘 다루는 윤고은 감독의 <손님>과 인물도 서사도 투박하지만 꿋꿋하게 갈 길 가는 <야구소녀>는 주인공들의 얼굴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또 일본 작품들과는 다른 결로 자기 세계를 확장해가는 <조제>의 조제와 여기에 ‘성장’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을까 저어되는, 하지만 그게 꼭 틀린 것도 아닌 <아워 바디> 속 자영의 삶을 응원한다.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은 성장이라기보단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운데 어떤 점에선 그게 그거지 뭐(?)
손님(윤고은) / 미워하는 마음이 뒤집히는 시간
야구소녀 / 아무리 추워도 먹어야만 하는 아이스크림이 있다
조제 / 더 가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너와 함께
아워바디 / 몸의, 몸에 대한, 몸을 위한 욕망
나의 문어선생님 / 이것은 무엇보다 사랑에 대한 이야기
서사의 매력보단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는 감각이 좋았던 작품들. 뮤비에 가까운 <아니마>를 제외하면, 이야기는 좀 아쉬웠다는 뜻. <울려라 유포니엄>에서 파생된 작품들은 확실히 애니메이션 시리즈에 비해 많이 부족하고 <바이올렛 에버가든 외전> 역시 이야기나 작화가 원작에 비해 특별하다는 인상을 받진 못했다.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는 올해의 아쉬움, 아니 2010년대의 아쉬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초에 길게 떠들고 쓴 바 있으니 패스.
스타워즈: 라이즈 오브 스카이워커 / 레이와 벤에겐 좀 더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울려라 유포니엄 극장판1-3 / 울려라 유포니엄, 그 곡의 따뜻한 선율이 마음에 남는다
리즈와 파랑새 / 다가서려는 간절함에 오히려 밀려날 때, 결국 우리는 푹 끌어안을 수밖에
바이올렛 에버가든: 영원과 수기인형 / 하늘을 향해 뻗은 두 손은 언젠가 만날 수 있을까
아니마
<삼진그룹 영어토익반>을 소재로 영화평론가 강유정 교수님이 쓴 글의 주제가 ‘여성과 주인공’이었다. 알고 보니 <걸캅스>나 <캡틴 마블> 때 익히 봤던 별점테러가 삼토반에도 있었던 모양. 거참.. 산술적으로 봐도 세상의 반은 여성이고 그동안 (특히 한국)영화에서 남성 재현이 과잉 수준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여성 서사의 등장은 여전히 환영할 일 아닌가. 올해 작품은 아니지만 <신문기자>는 지사(志士)적인 캐릭터에 젊은 여성을 등장시켰고 심은경 배우 역시 선이 굵은 서사를 끝까지 잘 끌고 갔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밤쉘>은 고 박원순 시장 사망을 겪은 2020년 한국사회에 꼭 필요한 영화였고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역시 다양한 매력을 가진 캐릭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기억에 남는다.
신문기자 / 신념은 떠들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
밤쉘 /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기 시작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권김현영)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 밟혀서 꿈틀하는 지렁이들의 꿈을 위하여
에놀라 홈즈 / 홈즈라는 이름의 땅이 넓어졌다
사회의 한 단면을 제각기 방식으로 그려낸 작품들. 환상문학스럽기도 하고 기괴하기도 한 애니메이션으로 노동자의 삶과 꿈을 담아낸 <내 몸이 사라졌다>, 스릴러의 쾌감을 느끼다 보면 트럼프 시대에 대한 풍자에 씁쓸해지는 <나이브스 아웃>, 불경할 수 있지만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인간적인 신성’에 대한 이야기 <두 교황>, 그리고 녹아내리는 노동을 직시하는 거장 켄 로치의 <미안해요 리키>까지.. 편수는 적었지만 오랫동안 텍스트로 남을 작품들.
내 몸이 사라졌다 / 나를 만든 기억과 내가 만든 흔적들
나이브스 아웃 / 트럼프 시대의 인과응보
두 교황 / 신은 '사이'에 임하신다
미안해요 리키 / 노동이 녹아내릴 때 삶은 무너져내린다
뒤늦게 본 명작들. <붉은 돼지>는 사실 분명히 본 적이 있는데 제대로 소화하지 못해서인지 기억에 거의 없었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21세기, 2020년에 봐도 손색 없는 명작을 20세기에 찍어냈구나. <네버 렛 미 고>는 팟캐스트 녹음 때문에 챙겨봤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묵직했다. 원작 <나를 보내지 마>에 겹겹이 쌓인 감정과 서사를 다 담아내진 못했지만 인물들의 눈빛, 떨리는 음성과 음악으로 더한 감성이 많은 걸 말해준다.
붉은 돼지 / 호탕한 웃음 뒤의 씁쓸한 읊조림
네버 렛 미 고 / 누가 인간엔게 신이 될 권리를 주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