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어쩌다 PD Mar 25. 2018

언시생 작문 #12

제시어: 술

첫 문단에 대한 현직 기자의 평이 좋았다.
'허름한 술집이었다'가 아니라 '지하철 역에서~'하면서 그려지듯이 묘사하는 게 중요하다는 뭐 그런 내용
친구들은 알겠지만 이 술집은 녹두호프다.
물론 디테일은 거의 다 뻥이고



14년째 다니는 술집이 있다. 지하철역에서 15분가량 버스를 타야 갈 수 있는 고시촌, 그나마 중심가도 아닌 골목의 끝, 지하 1층의 호프집이다. 사장님, 아니 이모는 덩그러니 강아지 옆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60명 남짓 들어갈 수 있는 가게에 손님은 한 테이블, 4명뿐이었다. “아이고 오랜만이다. 밥 먹었냐?” 올해로 예순넷, 나이가 무색하게 화장을 한 얼굴에 반가움이 비쳤다. 오랜만에 말동무가 왔다며 냉장고에서 청하 한 병을 꺼낸다.


이모는 학생들과 어울려 술 마시는 걸 좋아했다. “니기들하고 동무하니까 좋지”라며 또래 친구들 사이에선 자기가 가장 젊게 산다고 자랑하곤 했다. 새벽 2시쯤 손님들이 적당히 빠지면 단골들과 술판을 벌였다. 그렇게 항상 시끌벅적하던 술집이 지금은 고요하다. 장사 잘 되냐는 말을 삼키고 이모의 건강을 물었다. 이모는 요즘 술을 안 마셔서 건강하다고 했다. 그건 외롭다는 뜻이었다. 이모는 혼자 있을 땐 술을 마시지 않았다. 같이 술잔을 기울이고 안주를 나눌 사람이 있을 때만 술을 마셨다. 요즘은 이모 앞에 마주 앉아있는 사람이 없다.


7, 8년 전쯤부터 술집을 찾아오는 학생들이 눈에 띄게 줄었다. 학사주점의 분위기는 트렌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원래 학생회, 학회, 동아리에서 오는 단체 손님이 많았다. 일단 단체에 끼어서 와본 사람은 단골이 되지만, 생판 처음 찾아오는 손님은 없었다. 그런데 그 단체들이 하나둘 없어졌다. 단골을 붙잡고 “니기 모임 없냐?” 물으면 활동할 사람이 없어 망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과거 이모의 말동무였던 이들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대학가를 떠나고, 그 자리를 채울 새로운 말동무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은 이모 옆의 빈자리를 포메라니안 강아지가 지키고 있다. 심심함은 덜하지만 외롭긴 마찬가지다. 게다가 요즘 강아지는 부쩍 신경이 날카롭다. 맞은 편 건물이 재건축으로 시끄럽기 때문이다. 이모는 재건축도 달갑지 않았다. 그 건물에 있던 삼겹살집 사장님은 영업이 끝난 새벽이면 종종 이모를 찾아왔다. 둘이 함께 술을 마시며 상권이 줄어도 임대료를 올려대는 건물주 욕을 나누던 동무였다. 같은 골목의 다른 가게들은 업종이 너무 자주 바뀌어 몇 년 동안 새로 사귄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친하던 사장님 한 분이 재건축으로 이모를 떠난 것이다. 이모는 조금 더 외로워졌다.


이모는 장사를 접을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임대료도 못 벌어 보증금을 까먹는 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기들 가끔 찾아오면 좋으니께” 당장은 문을 닫지 않을 거라고 한다. 한 테이블 있던 손님들이 계산을 하고 나갔다. 사람 없을 때 담배 한 대 피자는 이모를 따라 밖으로 나섰다. 몇 년 전만 해도 그냥 가게 안에서 피웠을 텐데, 법이 바뀐 뒤에 단속을 가끔 나온다고 했다. 요 몇 년 사이 이모는 술친구들만 잃은 게 아니라 가게 안에서 담배 필 자유도 잃었다. “어머야, 오늘 무슨 날인갑네” 담뱃불을 붙이는데 반가운 목소리로 이모가 외쳤다. 나와 함께 종종 새벽까지 술을 마시던 친구 한 명이 웃으면서 걸어오고 있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모가 조금 덜 외로운 날인가보다.


(1,530자)

매거진의 이전글 언시생 작문 #1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