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당히를 몰랐던 완벽주의자의 고백

내 안에 있던 분명한 선, 그 선을 허물기까지

by 조아라

나의 선명했던 경계선


오늘 5회 차 코칭을 받았다.

코칭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내 안에 분명한 호불호가 존재하는 것이었다.


사실, 이것은 10대 시절부터 알고 있었다.

강한 호불호로 인해서,

어릴 때부터 "이건 싫고, 저건 좋아"라는 경계가 명확했다.



이 경계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때, 쟁취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하기 싫은 것이 명확하다 보니,

하기 싫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 하고 싶은 것을 더욱 열심히 하는

장작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사회생활 6년 차..

강한 호불호는 어느새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나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채로.


내 마음의 태극기, 그리고 불편한 DMZ

왜냐하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는 내 마음대로 선을 긋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인지하게 된 것은 오늘자 코칭에서.


코치분이 내 마음속에 있는 경계를 비유해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떠오르는 선명한 태극기.

이 태극기에서 빨간색 파란색이 나뉘듯, 내 세상은 '내 탓'과 '네 탓'으로 명확하게 갈려 있었다.


좋은 사람과 상황은 '나와 결이 맞는' 팀으로,

싫은 사람과 상황은 '문제가 있는 ' 다른 팀으로 밀어 넣었다.


문제는 그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애매한'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빨간 팀과 파란 팀, 어디에도 넣을 수 없어 마음이 불편해지고,

그 불편함 자체를 견디지 못해 갈등을 피하거나 관계를 손절해 버렸다.

그들은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DMZ)에 머물려 나를 계속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요즘 나에게 혼란을 가져다준 사람은 바로 이 경계,

태극기 선에 위치해 있었다.


그렇다 보니 나는 이 사람을 빨간 팀과 파란 팀 어디에 넣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경계를 허무는 마법, 그라데이션

코치님과 얘기하며 깨달은 점은,

굳이 경계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 상황이 내 성장을 저지하고 있다는 것이 보이기에,

이 선을 명확하게 하지 말고 그라데이션으로 표현해 보는 것이다.


때로는 상황에 따라

빨간 팀에 있던 사람이 파란 팀에 갈 수도 있고,

하늘색에 갈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그것처럼,

그라데이션에도 사람이 자유롭게 머물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거의 처음으로,

내 마음 안의 경계를 인식하고 그 경계를 그라데이션으로 만들었다.


아마 이것도 자주 연습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이 그라데이션과 함께한다는 것을 인지한 순간

내 마음속 빗장이 열어지면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주마'에게 없던 단 하나의 선택지

나 또한 스스로 깨달은 것은,

이 경계선에 위치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과거의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는 '경주마'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주변 풍경을 보며 여유롭게 걷기도 하고,

필요할 때 달릴 줄도 아는 '제주도 말'처럼 변하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깨달은 것은, 세상에는 전력질주하는 경주마와

여유로운 제주도 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이의 '적당히 뛸 줄 아는 말'도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여유의 중요함을 알고,

때로는 걷거나 뛰거나를 반복하면서 완급조절을 해오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일을 계기로 깨달은 것은,

세상은 걷거나 뛰는 것 말고 '적당히 뛰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마 적당히 살아보지 못하다 보니

'적당함'것이란 것을 몰랐나 보다.


이제 적당히 하기를 배웁니다.

이것을 인식하고 나니,

내가 왜 그렇게 '완벽주의성'이 강했는지도 인식했다.


하거나 or 안 하거나.

이게 내 사고방식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곳에 '적당히 하기'도 포함시켜 보자.


그래서 완벽이 아니라

'재미'가 느껴지게 적당히 해보자.


때로는 적당히 뛸 줄 아는 것도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가 된다는 것을

30대에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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