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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조각들

by 김민규

생명은 기억으로 뭉쳐있다. 물질과 영혼은 기억에서 만나 생명을 이룬다. 기억은 욕구의 출발이고 미래에 투사되어 공포를 낳는다. 후회와 욕망이 엉킨 인간 인식의 한계가 시간을 창조하고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가른다. 시간이라는 물자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시간은 관념이고 시간은 단어이다.


자연은 수치심을 모른다. 물고기의 기억력이 3초라면 3초마다 새로 태어나는 셈이다. 기억을 못 하면 후회가 없다. 후회가 없으면 걱정이 없다. 물속을 벗고 다녀도 수치심을 모른다. 모르면 자유롭다. 2014년 7월 캐나다 맥이완 대학교 연구진들에 따르면 물고기의 기억력은 12일 이상이다. 물고기는 시간을 안다. 과거에 묶이면 미래를 안다. 미래에 묶이면 공포를 안다. 공포를 알면 분노를 안다. 물고기는 화가 난다.

나의 기억은 안산시 월피동 한양아파트 201동 102호 화장실에서 출발한다. 어머님과 누나가 다리와 엉덩이를 잡고 아버님께서 상체를 제압해 거꾸로 들어 콧속에 샤워기로 물을 넣는다. 나는 아가미가 없다.


나 다섯 살 즈음 아버님께서 홧김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 회사 사장이 아파트 한 채 값인 수 천만 원을 들여 아버지를 감옥에서 꺼냈다. 시골에 던져둔 자식을 찾으러 왔을 때 물고기는 기억을 지웠다. 어미가 젖을 물리니 기억을 찾은 나는 물고기 보다야 낫지 아무렴.


이 십대 시간의 대부분을 도서관에서 탕진했다. 대기업 임원이 되고 싶었다. 자신감이 과했다. 공부를 시작하고 나서 흘리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깊어 식사시간을 낭비로 여겼다. 하루를 삼일처럼 쓰고 싶었다. 친구들과 식사를 하면 비싼 밥을 먹어야 했다. 후식을 먹어야 했다. 피시방에 가야 했다. 당구장에 가야 했다.


부모의 돈에 기생해서 사는 머저리들과 함께 한가로이 흘려버리는 시간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시간을 택하고 친구들을 버렸다. 혼자 밥을 먹기 시작했다. 스스로 허락한 식사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맛을 느끼고 감정을 삼킬 여백이 없었다. 적은 돈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식사를 해결하고 싶었다. 아침을 최대한 배불리 먹고 두 개에 1200원에 팔던 삼각김밥을 사 먹었다. 음식물 반입이 금지된 도서관에 몰래 숨어 들어가 공부 중에 김밥을 입안으로 찔렀다. 밥이 아닌 사료였다. 짐승의 식사였다. 늦은 밤 집에 돌아가서 남은 음식으로 허기를 메웠다. 소화되지 못한 공포와 불안이 위를 찔렀다. 내가 시간을 쫒는 건지 시간이 나를 쫒는 건지 구분이 안 된다. 시간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십 년 뒤 부모의 돈으로 결혼하게 될 친구들이 아기를 갖게 되면 만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이 틀리지 않았다. 친구를 버리고, 교양을 버리고, 예의를 버리고, 염치를 버리고, 양심을 버리고, 하나를 버리고 둘을 버리고 나서는 더 이상 버릴 게 없다. 의리가 없다는 뒷말이 돌았다. 의리에는 돈이 필요했다. 사랑에는 돈이 필요했다. 사랑을 크기를 돈의 크기로 증명해야 했다. 마음은 크고 돈이 적었다. 돈과 시간이 적어서 관계를 끊어내야만 하는 일에 거듭 부딪쳤다. 떠나는 상대를 오래 원망하다가 끝에는 나를 원망했다. 실망이 반복되고 마음이 한 겹 씩 벗겨지고 더 이상 벗겨낼 마음의 껍질이 없자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벗겨진 마음을 어항에 담그고 세상을 어항 밖에 가뒀다.


나쁜 사람은 자신이 나쁘게 살게 되기까지의 지난한 과정을 겪는다. 끈적하고 냄새나는 고민의 세월을 거쳐 나쁘게 살기를 선택한다. 이유 없이 착한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나쁜지를 알 길이 없다. 나는 나쁜 사람보다 멍청한 사람이 조금 더 싫다. 나이가 들어서 까지 스스로를 멍청하게 방치한 것이 나쁘게 살기를 선택한 것보다 조금 더 나쁘게 느껴진다.


한편, 똑똑한 사람보다 행동하는 사람이 조금 더 좋다. 도덕의 논리적 성을 쌓아서 말로 떠드는 일은 품이 몹시 많이 들지만 누구나 할 수 있다. 논리의 견고함과 상관없이 선을 행하는 일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입이 하지 못하는 일을 손발은 해낸다.


정해진 시간에 다 같이 점심을 해결하는 사람들을 볼 때 은밀하게 뿌리내린 전체주의를 느낀다. (전체주의가 어떤 질량과 형태로 존재하는지는 측량과 평가가 불가하고, 그냥 나 혼자 그것이 있다고 느낀다. 객관이란 얼마나 하찮은 개념인가.) 비슷한 시간에 깨어 교통체증에 끼어 학교와 직장에 모여 시간을 흘린다. 몰입하는 척 서로를 속이고 월급을 내주고 받아간다.


먹어야 삶을 지속할 수 있고 돈을 벌어야 먹을 수 있다. 삶과 돈의 질긴 인연에 치를 떨다가 몸이 고장 난 건지 마음이 고장 난 건지 허기가 느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시기마다 끼니를 챙기는 일이 지겹다. 돌도 씹는 청소년기를 지나고 30대에 들어 자극적인 음식을 위장이 받질 못한다. 위장이 늙고 마음도 늙어 거친 사람, 거친 사랑, 거친 삶을 소화하지 못한다. 거친 만남을 줄이고 피하니 성격이 온순해지는 기분이다. 자극을 줄이고 늘어진 탄력을 다소간 회복한다.


가벼운 삶을 살겠노라는 다짐을 너무 쉽게 잊곤 한다. 너무 많이 몰입하거나, 너무 급하게 감정과 음식을 삼키고는 감정과 위장이 엉켜 붙어 고장 난다. 나의 경우, 급체는 어깨로부터 온다. 혈이 막혀 손발이 차고 겨드랑이에 맥이 없는 땀이 새어 나온다. 새벽에 홀로 깨어 변기를 잡고 씨름하고 나면, 낮에 목구멍에 쑤셔 넣은 음식물이 위로 솟아 변기물 위를 배영하며 날 보곤 비웃는다.


아프면 온 정신이 쏠리고 중요했던 일이 부수적인 것으로 밀린다. 죽음을 바라보며 사는 삶이 있고 죽음이 오는지도 모르고 사는 삶이 있다. 나는 죽음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산다. 살아봐야 인생이 버겁기만 한데 죽음이 언제든 다가오면 차라리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몸에 힘이 빠진다.


놓고 살면 되는데 잡고 사는 것은 죽음 자체가 두려워서 이고, 죽음에 이르는 고통의 과정이 두려워서 이고, 다시 말해 말과는 다르게 속내는 살고 싶어서 이고, 그냥 사는 게 아닌 잘 살고 싶어서 이고, 밥만 먹고사는 게 아니라 밥 너머의 존경과 감탄과 인정을 주식으로 먹고 싶어서 이다. 무인도에 혼자 살면 성기를 가리는 일이, 얼굴에 화장을 하는 일이 다 무슨 소용일까. 구경꾼들에게 증명해야 하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젊음을 탕진한다가 시간의 덧없는 탕진을 후회하며 늙어 죽을 운명이다.


지금 쉬어도 되는지, 쉴 자격이 있는지, 오늘 쉬면 내일은 어떻게 되는지, 밥을 먹고살 수 있을지, 십 년 뒤 노동을 더욱 얇아진 다리가 감당할지, 온갖 걱정에 휩싸여 몸은 쉬라고 신호를 보내는 데 멈추지도 못하고 달리지도 못한다. 나의 의지로 달리는 건지, 타의 의지로 달리는 건지, 세상의 의지로 달리는 건지, 나의 의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건지, 자유의지란 어디에 있는지, 나는 자유인 인지 의심이 들기 바쁘게 할 일은 밀려온다. 관계를 맺고 의무가 늘어 삶이 비대해지면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을 비우고 감정을 비우고 관계와 욕망을 차례로 버리면 가벼운 몸으로 속도에 오를 수 있다. 속도가 오를수록 시야는 좁아지고 삶이 명확해져, 목적지가 어디고 출발점이 어딘지 잊어, 비로소 돈 버는 기계가 된다. 기계가 자연의 섭리를 벗어나 오래 과로하면 크고 작은 병이 난다. 혓바늘 돋고 배에 가스가 차고 손 발끝이 차고 겨드랑이에 식은땀이 난다. 독소가 쌓여 몸이 무겁고 눈이 침침해 앞날이 아득하다. 스스로의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는 개체는 자연이 멈춰준다. 스트레스와 과로에 너덜해진 면역력을 균이 뚫으면, 왜 달리는지 점검해 볼 시간이 주어진다. 질병과 노화는 선물이다. (그럴 리가. 선물은 무슨.)


몸이 축나면 세상과 스스로에 대한 증오를 잠시 놓는다.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살아있는 자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아파야 한다. 며칠간 고열로 샤워를 하며 땀과 진액을 짜내면 몸이 한결 개운해 가볍다. 가벼움은 오래가지 않아 다시 끈적임으로 바뀌고 욕망에 감겨 또다시 속도에 오른다.


꼬인 위장과 엉킨 마음을 국물이 푼다. 뭐라도 먹긴 해야겠는데 소화력이 떨어져서 묵직한 음식이 감당이 안 될 때 국물을 자주 찾는다. 식재료의 맛이 국물에 스미고 국물이 다시 식재료에 스미어 서로를 감싸서 만드는 조화를 마신다. 국물은 내가 되고 배설물은 땅이 된다. 나와 땅이 둘이 아니라는 걸 국물은 가르친다. 음식물이 똥으로 나오는 데 약 24시간이 걸린다. 성인은 1회 평균 200~400g의 똥을 싸고 평생 10,000kg의 똥을 싼다. 밀집 인구의 똥을 안전하고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일에 사회와 국가의 국운이 걸린다. 5천만 국민의 똥을 매일 처리하지 못하면 세상은 똥밭이 된다.


채우려면 비워야 한다. 집에 물건을 채울수록 물건을 소유한 만큼 사람이 실제 누릴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든다. 사람을 위한 집이 아니고 물건을 위한 집이다. 책임질 일과 책임질 관계가 늘수록 인생의 여백이 줄어든다. 우선순위를 정해 비울 용기가 필요하다. 보낼 사람과 보낼 물건을 고르는 일은 괴롭다. 괴롭지만 보내야 한다.

강제로 빼앗기는 사건의 연속에서 삶의 단조로움과 가벼움에 매료되어 사물과의 관계나 인간과의 관계를 최소화하는 삶에 대해 고민했다. 온갖 핑계와 합리화를 끌어와서 아무 책임도 지지 않고 아무 위험도 지지 않으며 어떠한 정치 공동체나 이익집단 혹은 가족을 이루지 않고 사회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홀로 살다 명을 채우곤 자연사하는 삶을 양상을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위기를 넘기고 잊어 내장과 마음에 다시 때가 끼고 나서는 사람이 그립고 사랑이 그립다. 뿌리 뽑힌 줄 알았던 인정 욕구가 고개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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