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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쪼바다에 누워 Jul 16. 2021

"올해는 남자 없으니까 마음 비워요."

문래동 기획회의 07.


"반지랑... 신발이 보이네?"

신당 안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다가 쌩뚱맞은 무당의 첫 마디에 '에...? 에에?' 했다. 태어나서 처음 본 '무당'은 내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무당의 모습과 거리가 아-주 멀었다. 위압적인 컬러 조합의 한복 같은 것 대신 아주 일상적인 평상복을 입고 있었고, 인상도 날카롭기 보다는 살짝 졸린 얼굴이었다. 좀 퉁퉁하고 게으른, 옆집에 사는 나이 찬 옆집 백수 언니 같았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들어선 신당이라는 곳도 그냥 투룸 빌라의 한쪽 방이었다.

전철역에서 내려 그 점집까지 가는 길에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뒷목이 다 뻐근할 지경이었는데, 문을 열어준 친숙한 '옆집 언니'의 얼굴을 보자마자 '잘못 왔나?'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긴장은 풀리고 마음이 조금 편해졌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조금 김이 샜다.


그 옆집 언니(?)는 내가 앉자, 생년월일과 이름을 묻고 쌀알을 던졌다. 한참 쌀알들을 바라보더니 던진 첫마디였다. 쌀알은 진한 체리색 반상 위에 산발적으로 흩어졌다.


"반지는 뭐고 신발은 뭔...데요?"

옆집 언니가 말을 뒤잇기도 전에 초조한 나는 앞질러 물었다. 그 언니는 또 눈을 감고 중얼중얼 하더니 나무 재질의 연필곶이 같은 것에서 깃발 하나를 뽑더니 촥! 펼쳤다.


"회사 옮기시려고?"

(칼답) "아니요."

그때만 해도, 나는 회사를 평생 다닐까 싶을 정도로 무난하게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전혀 떠올려본 적도 없는 단어가 '이직'이었다.

"그래?.. 음 그럼 팀을 옮기려나."

"... 그럴 일이 없는데..."

팀을 옮길 일도 없는 회사였다. 팀 이동은 곧 보직 이동을 뜻하는 터라 그럴 일이 생길 일이 만무했다. 두 번 거절 당하자(?) 옆집 언니는 나를 다시 쳐다보더니(빤히 응시했지만 전혀 날카롭지 않았다.), 아까 뿌린 쌀을 다시 들여다봤다.

"아, 자리 옮기겠네. 6월쯤."

"...아 네..."

순간 '아, 내 5만 원.' 싶었다. 5만 원이면 냉삼 3인분 하고도 소주 3병을 너끈이 마실 수 있는 돈인데. 머나먼 김포공항역까지, 이 좋은 주말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 5만 원 기부하러 여기까지 왔나 절망스러웠다. 아니지. 아직 모른다. 얘기를 좀 더 들어보고 실망하기로 했다.

"그럼 반지 보인 건 뭐예요?"


'반지'의 의미가 중요했다.


근처에도 안 가던 점집을 서른 한살이 되자마자 방문한 이유는 그 '반지'랑 관련된 것이었다. 나의 질문은 딱 하나, "내가 결혼을 하긴 하나요?"였다.

결혼이 당장 너무 하고 싶어서 "대체 나 결혼 언제해요?"이 뉘앙스로 읽혔으면 완전히 오해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운데, 그때의 나는 결혼을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미루고 싶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하긴 해야겠는데' '최대한 나중에'라는 희망사항이 붙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혹시 결혼을 하네마네 하는 남자친구가 있었나 싶지만, 당시에는 연애에도 크게 갈증을 못느끼는 상태였다.

즉, 연애고 결혼이고 나 하고 싶은 거 실컷 하다가 느즈막히 좀 맘 맞는 남자 만나면 좋을 거 같은데 '그게 가능할까요?' 정리하면 이게 진심이었다.


당시 '서른 한살'이라는 나이는 뭐랄까. 결혼할 남자친구가 있든, 결혼을 할 예정이든, 결혼을 했든, 뭐 이 3가지 중 하나에 내 상황이 안 걸려 있으면 "왜 없어요?"라든가 "왜 안 해요?" 같은 소리를 삼시세끼처럼 듣던 때였다. 차라리 그 시기가 조금 지나가면 '그런가 보다.' 하는 건지 또 한동안 그런 얘기를 안 듣긴 했지만... 하여간 그때는 유독 그랬다.


정작 그때의 나는 결혼을 전제로 연애를 할 생각도, 결혼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 이 시기를 맘 놓고(?) 놀아도 되나?' 이렇게 놀아도 '한 서른 다섯 넘어 결혼운이 있어 '그래도' 결혼은 하려나?' 그렇다고만 한다면, 어디까지 리밋을 정해놓고 막 다 하고픈 대로 놀다가 딱 '지금부터 한번 찾아보지.'하며 출동이라도 할 것처럼. '정말 운명이라는 게, 팔자라는 게 있다면 그런 게 정말 나와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이 정도면, 5만 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내 인생은 '남 입'을 통해 한 번 들어라도 보자 싶었다.


"반지를 받는 게 보이긴 하는데... 좀 멀어."

옆집 언니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그래요? 그럼 저기... 제가 결혼을 하긴 하나요?"

정말 이렇게 웃긴 질문이 세상에 있을까. 내가 결혼을 하는지 마는지를 처음 본 사람한테 묻는다니. '신'이라는 게 진짜 있어서 내 정해진 미래를 다 알고 있고 그걸 저 옆집언니, 아니 무당에게 귓속말로 알려줬다고 완벽하게 믿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괴상한 질문이었다. 내 인생을 남한테 묻는 이상한 상황.

"응. 해. 결혼해. 하긴 해. 근데 좀..."

'하긴 한다'는 말에 '오!' 한시름 놓으려는데, 옆집 언니는 덧붙였다.


"근데, 우리 언니. 워낙에 일생에 남자가 좀 없다?"


내 옆에 다소곳이 앉아 있던, 나를 이 점집으로 이끈 친구는 순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푹!'하고 웃었다. 나 역시 같이 '푸풉'하고 웃었지만, 영 씁쓸했다. 사실이 아니진 않았기 때문에. '오? 어떻게 알았지?' 생각하면서 이때부터 이 옆집 언니가 무당으로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의 말에 신빙성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특히, 올해는 없어. 뭐 '이놈 저놈' 왔다갈 순 있는데, 다 쭉정이고. 그러니까 마음 비우고 자유연애 해. 언니는 좀 그래도 되겠다. 그냥 좀 만났다 헤어지고 해. '자유'. 자유연애 알지?"

액면은 나보다 서넛 위 정도밖에 안 돼 보였는데 '자유연애'라는 어휘를 씀과 동시에 이 옆집언니 연배가 의심스러워졌다. 대체로 의미는 통했으나, '자유연애'라니.(5년이 지난 지금도 귓가에 선명한 단어.) 혹시 어떤 내가 모르는 연애 장르가 따로 있는 건가 싶을 정도로 '자유연애'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여러 번 말했다.


점사가 끝나고 옆집언니의 배웅을 받으며 그곳을 떠나는데, 이 점집을 추천하고 또 데려오기까지 한 친구는 살살 내 눈치를 봤다.

"어때? 맞나? 맞는 거 같아? 괜찮아?"

표정이 흡사 내가 강추에 강추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데려간 고기 맛집에서, 구워진 고기를 친구가 딱 첫 입 먹자마자 그때의! 내 표정 같았다. "어때? 맛있어? 맛있지? 여기 진짜 잘하는 집이야!" 이러면서.


사실 맞춘 건 없었고 (내 일생 진지하게 만난 남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 외에는 내 성향이나 과거 얘기들도 거의 틀렸다.) 검증된 예언들도 아니었지만, 요상하고 또 요상하게 어쩐지 그 언니 말을 다 믿고 싶었다. 실제로 신이 왔었는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신이라고 내 인생 다 아는지는 더더욱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 점사가 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을지도.

일단 결혼을 한다 그랬고, 올해는 맘껏 놀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나는 집에 가는 길에 결심했다.

"그래. 올해는 가는 남자 안 막고 오는 남자 안 막는다. 반드시!!!! 나 좋다는 놈은 일단 만나고 볼 거야."


실제로 그 해, 연초부터 '이놈 저놈'이 다가왔다.

평소 같았으면 '이래서 싫고' '저래서 가볍고' 하며 철벽 치기 바빴을 나지만 이번엔 달랐다. 한 번, 두 번 만나자고 하면 만나고 밥도 먹고 술도 마셨다. 서너 번까지 가는 경우는 잘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큰 변화인 데다가, 그렇게 가볍게 만난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지 않았다. 이게 뭐라고 참.


그러다 4월에 다가온 '그놈'은 심지어 다섯 살이나 어린 놈이었다. 물론, '알고보니' 어렸기 때문에 처음부터 '남자 아님' 카테고리에 넣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호감 섞인 카톡이 올 때 사실 살-짝 망설였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어린데...'

 마음속 소리와 달리, 적극적으로 말을 걸고 만남을 청하는 그놈이 생각보다 싫지도, 어리게 느껴지지 않았기에 딱히 또 거절할 이유도 찾지 못했다.

'그래 뭐, 내가 언제 다섯 살 연하를 또 만나보겠어. 만나보자! 앞으로 나가!(?) 일단 만나보는 거야!'

 첫눈에 반하지도, 미치게 좋아서 심장이 벌렁대지도 않는데, 그런 이성과 만나기 위해 주말에 시간을 내는 내가 낯설게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로 재밌기도 했다.

'이렇게 올해 이놈 저놈 오는 대로 다 만나다가 나 막 연애 도사 되는 거 아니야? 만났던 남자 이름도 기억 안 나게 한 트럭 되는 거 아니야?'

한 트럭에 실린 남자들과의 에피소드를 풀고 있는 팜므파탈적인 눈빛의 나를 상상하면서.


아쉽게도(?) 그 야무진 상상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해 나에게 더이상의 쭉정이 '이놈 저놈'은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연하의 '그놈'은 쭉정이가 아니라, 세상 옹골차고 성실한 데다가 나에게 진심인 '알 꽉찬 열매'였다. 지나치는 인연인 줄 알았던 '그놈'은 나와 대단히 달달한 연애를 하다가 2년하고 2개월 뒤에 내 손에 결혼 반지를 끼워줬다.




옆집 언니 같았던 그 무당에게 보인 반지가 이 반지였을까? 알 순 없지만, 그게 뭐였든 지금은 그에게 감사한다. 나에게 '자유연애'를 권장했고, 내가 그 말을 어느 정도 받아들여 이런 저런 만남에 마음을 열고 다가갔기에 지금의 남편을 만날 수 있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일생'에 남자가 별로 없단 소리도, 우리 남편이 내 마지막 남자가 될 것이었기 때문 아닐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다.


아참, 그리고 재밌는 사실 하나.

나는 그해 6월 실제로 회사에서 자리를 옮겼다! 웃기지만 자리 이동 공지가 떴을 때 '으악!' 하고 나는 점집에 동행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야! 대박! 나 진짜 자리 옮겨!"라고 소리 질렀다. 이 정도면 그 옆집 언니, 아니 그 무당님. 용한 건가? 푸하하. 이것도 다 내가 생각하기 나름인 거겠지?


그래도 이제 5만 원 생기면 점집 안 가요. 냉삼집 가요.



방실방실 아조씨 | 포차성애자. 소녀 감성과 아저씨 취향 그 사이 어디쯤에서 소맥을 말고 있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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