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제 Dec 27. 2018

모든 남자가 다 그런 건 아니라는 말에 대해

나는 가족 내 성폭력의 생존자이고, 어릴 때부터 살아오면서 길에서든 학교에서든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든, 문단에서든, 커뮤니티 내에서든 다양한 남성에 의한 성폭력을 겪고 살아왔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살아온 내게 삶은 항상 힘들었고 우울증과 정서불안과 가난과 인간과 남성 공포에 시달렸다. 나를 돌아보거나 사회시스템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작년부터 트위터와 각종 인터넷 매체를 통해 페미니즘에 대해 알게 되고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내가 재수 없고 혹은 바보 같아서 겪었다고 느꼈던 성폭력이나 다양한 문제들이 사실은 많은 한국 혹은 세계의 여성들이 겪어왔던 것이고, 사회 시스템이나 인식의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눈이 번쩍 뜨이고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나는 밤길이 무서워 일찍 다니려고 노력하는 편이었고 길을 다니든 택시를 타든 항상 혹시 있을 모를 남성들로부터의 위험에 대비하며 살아왔다.


예쁘게 보이면 성폭력의 표적을 될 것 같아 한참 마음상태가 안 좋을 땐 일부로 후줄근하게 옷을 입고 다니기도 했다. 여성들은 어릴 때부터 밤길을 조심하고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나도 이 세상엔 나쁜 남자들이 많고 ‘남자는 늑대이니(?)’ 내가 조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메시지에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조심하고 또 조심하면서 살아야 더 이상 ‘몹쓸 짓’을 안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전 밤 9시도 안 된 시간에 배가 고파서 간식을 사러 아주 환한 대로변의 편의점에 갔다 오는 길이었다. 술에 취한 중년 아저씨가 내게 추잡한 말로 수작을 걸며 내 앞을 막아섰다.


그때 내가 예쁘게 입고 있었나? 아니다. 집에서 입는 추리닝 차림에 머리도 안 감아 후줄근했다. 그렇지만 짐작해보면 그 중년 남자는 내가 자기보다 힘이 약해보이는 여자이고, 술에 취했단 이유로 내게 수작을 건 것이다. 아마 힘이 세 보이는 젊은 남자에게는 그렇게 시비를 걸지 않았을 것 같다.


나는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로 이런 상황이 되면 머리가 멈추고 얼어버린다. 눈물 먼저 터져 나온다. 제대로 대응할 수 없고 입이 떨어지지도 않고 심지어 도망조차 못 친다.


하지만 갖은 힘을 끌어 모아 그 남자의 손이 내 몸에 닿기 전에 뛰어서 편의점 안으로 도망쳤다. 다행히 그 남자는 편의점 안까지는 따라오지는 않았다.


나는 점원에게 안 보이는 편의점 구석에 잠깐 쭈그리고 앉아 울었다. 그런데 울다가 전과 달리 마음속에서 분노가 조금씩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도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뭐지? 나는 그냥 간식을 사먹으려고 집 근처 편의점에 왔을 뿐인데... 왜 이런 일을 겪고 겁먹고 울어야 하는 거지? 이것은 뭔가 잘못 되었다.’


내가 이런 크고 작은 남성의 의한 성폭력 상황을 겪었을 때 여태까지 나는 내가 좀 더 조심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무섭고 겁나고 죽고 싶기만 했지 가해 남성에 대한 분노를 품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이번엔 뭔가 달랐다.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났다. 나는 잘못한 게 없었다. 잘못은 그 남자가 했다. 여성이 밤길을 조심해야 한다는 것도 화가 났다. 여기는 약육강식의 정글이 아니고, 먹이사냥터가 아닌데 왜 여자는 밤길을 걸을 때 남자보다 더 조심하고 무서워해야 하는가?


이건 여자의 잘못이 아니라, 여성의 밤길을 위협하는 성폭력 가해 남성들의 잘못이 아닌가!


이런 깨달음을 얻자, 나의 눈물은 잦아들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내가 조심해야 하는 것보다 먼저, 이 사회 시스템과 남성의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게 어렵다는 건 알지만 일단 그런 인식이라도 서로 공유되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성폭력 범죄자는 아니다. 그런데 자기 앞에서 한 여성이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말하며 남성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낼 때, 일부 남성들은 그걸 남성 종 전체, 그리고 자신을 향한 공격이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모든 남자들이 다 그러는 건 아니잖아요? 그런 일반화는 나를 모욕하는 것 같아 듣기 불쾌하군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럼 나는 이제 이렇게 대답해 줄 것이다.


“기분이 상해서 참 안됐네요. 그런데 당신은 성폭력 범죄피해를 당한 여성의 ‘고통’보다 자신의 ‘기분’이 상한 걸 더 우위에 두고 있다고 들립니다. 공감 능력을 더 키워야 하는 건 당신이 아닐까요?


폭력피해나 교통사고 피해를 당한 사람에게는 모든 사람이 그런 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데, 유독 남성의 성폭력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해요?


성폭력은 여성에게 ‘생명과 목숨의 위협’이고 당신에게는 ‘기분과 모욕’의 문제인데 어떤 게 더 심각한 걸까요? 일단은 자신의 모욕감보다 여성들의 고통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과 머리를 열고 상상해 그 고통에 최대한 공감하고 나서, 다음 단계를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여성들은 정말 너무나 많은 성폭력과 폭력, 여성 살해를 겪으면서 생존해왔는데 그 사실보다 자신은 선한 남자라는 믿음에 대한 모욕감이나 억울함을 먼저 강조한다는 건 스스로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작가의 이전글 조제의 심리치료 과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