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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18. 2020

난 자리 만들기

출국#2 한국생활 정리

타고난 오지랖퍼라 그런가? 어느 집단에 들어가든 가급적 중심에 있든지 아니면 그 집단에 눌러앉지 못했다. 돌이켜 보면 대부분의 집단에서 그랬다. 아주 잘하지 못했지만 뭘 해도 열심히는 했다. 결과보다는 자세라는 생각이 강했기에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2006년 1월에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십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그렇게 살았다. 나의 지위에 상관없이 최선을 다하려고 했고, 작은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되더라도 최대한 중심에 있으려 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일복 많은 사람이 됐고, 돌쇠 같은 이미지를 자연스레 얻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도 그랬다. 조직 창설 이후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에 투입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전체 총괄 업무를 맡게 되었고, 모두의 관심이 집중된 터라 거의 매일 임원 보고를 들어갔다. 내 손을 거쳐 작성된 초안들이 최고 의사결정자의 손에 들어갔고, 자연스레 내 자리가 무게를 얻게 되었다.


천천히 자연스럽게 나의 자리를 후임에게 넘겨주었고, 조금씩 그 자리에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밖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자연스럽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는데, 어깨너머로 들려오는 회의 내용도 왠지 내가 개입되어야만 할 것 같고, 가서 한 마디 거들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애써 지워내는 것이 한편으로 후련하면서도 서운하달까? 시원섭섭하다는 말이 이처럼 잘 들어맞기도 힘들다 싶었다.


자리를 비우는 일은 회사에만 있지 않았다. 가까운 친구들과도, 가족들과도 잠시 이별 아닌 이별을 해야만 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신 아버지께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예배드리는 순서를 놓치고 싶지 않아 하셨고, 평생을 다니신 교회 목사님께 연락드리는 것도 단단히 당부를 하셨다. 중학교 이후 가족들과 떨어져 살면서 가족들이 다니는 교회에는 거의 가지도 못하는 데다 목사님도 새로 오신지 얼마 안 되어 얼굴도 잘 모르는데 아버지의 부탁을 저버릴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가까웠지만 근 몇 년간 전화 통하도 하지 못했던 먼 친척들께도 빠짐없이 연락을 드려야 했다.


나의 자리를 비우는 것은 그럭저럭 할 만했다. 내가 결정했고, 해야만 하는 일이니 말이다. 그런데, 5살짜리 아들이 어린이집 친구들과 이별을 마주해야 하는 순간에는 아들 못지않게 나도 맘이 무거웠다. 처음에는 차마 친구라면 죽고 못 사는 아들에게 친구들과 이별을 한다는 말을 먼저 못 하고, 10월인 생일 파티를 조금 당겨서 8월에 하게 된다고만 말해주었다. 생일 파티를 한다는 말에 잔뜩 흥분한 녀석은 그 생일 파티가 작별 인사라는 사실을 끝까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다 내일부터 어린이집을 가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되었고, 그 내일이 오자마자 친구들을 보고 싶다고, 어린이집 선생님께 전화를 걸어달라고 가뜩이나 떠나는데 맘이 동하지 않은 아내를 며칠 째 조르고 졸랐다.



아들의 어린이집 송별파티 겸 이른 생일파티 (즐거움과 서운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표정이다.)


살고 있던 집과 차도 처분해야 했다. 당시만 해도 부동산 대폭락을 점치던 시절이었다. 한국에 남아있더라면 상황을 봐서 전세에서 자가로 갈아타려고 하던 시점이다. 마침 살던 집의 주인분께서 집을 내놓으시며 우리에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셨는데, 바보같이도 나는 지금까지 후회할 결정을 내리고 마는 실수를 기어이 저지르고 말았다. 아내의 출퇴근 길을 책임져주던 차는 마침 중고차를 찾던 친구에게 넘겼다.


모든 걸 처분하고 처가와 본가를 오가면서 '아, 내 나라에 이제 내 터전이 없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심란했다. 물론 돌아올 직장이 있긴 했지만, 내 처소가 없고 뭔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나는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속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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