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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18. 2020

정착 준비

출국#4 현지인 되기 시작

우리 가족이 다 같이 삼 년은 살게 될 도시에 도착했다. 캠퍼스로 향한 긴 언덕을 오르다 보면 평온하게 펼쳐진 푸른 초원과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중세풍의 도시는 정말 내가 유럽에 와 있구나라는 느낌이 선명하게 들게 해 주었다. 이국적인 정취를 좀 더 여유롭게 느끼고 싶었으나, 가족들이 도착하기 전 내게 주어진 시간은 정확히 두 주, 그 기간 내에 나는 우리가 거쳐할 숙소를 구하고, 자동차를 알아봐야 했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능하려면 먼저 은행 계좌를 만들어야 했다.


Bath skyline walk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에서 내려다본 시내 전경)  (출처 : National Trust)


캠퍼스 내에서 지점이 있는 은행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 알아보니, 산탄데르와 바클레이가 있었다. 산탄데르는 계좌 유지비용이 있어 일찌감치 포기하고, 바클레이에 문의해보니 학교에서 제공해주는 재학증명서가 있어야 한단다. 학교에 문의해보니 현재 입학 준비로 많이 바쁘고 며칠 기다려야 한다고 한다. 처음부터 순탄치 않았다.


일단 집을 알아보자 싶어, 인터넷으로 주변에 괜찮은 학교가 있고, 캠퍼스와의 거리가 많이 멀지 않은 곳을 위주로 가구가 구비된 Furbished house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영국에 오기 전 점찍어 두었던 집은 이미 다른 누군가에 의해 계약이 된 터였다. 온라인으로 문의를 한다고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아, 일단 발품을 팔아 시내에 있는 부동산 중개소를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몇 군데 가서 상담을 해보니 렌트 계약 시스템을 파악할 수 있었다. 먼저 집주인이 부동산 중개소에 매물을 내놓으면, 부동산 중개소에서 매물 안내를 내고, 좀 더 광고가 필요하다 싶으면 온라인 사이트에 올리는 방식이었다. 온라인 사이트를 보고 세입자들이 집을 보고 싶다고 의사를 밝히면 부동산 중개인과 집주인이 집을 보는 날짜를 정해서 그 날에 관심을 보인 세입자들이 돌아가면서 집을 보고 최종적으로 계약 의사를 밝히면 집주인과 계약을 체결한다. 


현지 방식으로 진행되면 시간이 너무 걸리는 데다가 내가 맘에 들어도 최종적으로 계약이 된다는 보장이 없었다. 마침 바로 집을 보여주는 중개소가 있어 보고 왔는데, 거리도 먼데다 가격도 비싸고 가구도 없는 집이었다.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자동차도 마찬가지였다. 시내 주변에 있는 중고차 매장을 모두 돌아보았다. 내가 예상한 예산으로는 살 수 있는 차들은 형편없었다. 괜히 잘못 샀다가 수리비만 더 많이 쓴다는 주변의 충고들이 내 이야기가 될 것만 같았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처음 일주일 간은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고 버스 노선도 잘 몰라서 무작정 걸었다. 버스비도 너무 비쌌고 주변 지리도 익히자 싶었기에 오히려 잘 됐다 싶었다. 다행히 출국 직전 산 운동화가 큰 도움이 되어 주었다. 어차피 학교는 방학기간 중이라 사람도 별로 없고 공부를 할 생각도 없었기에 최대한 정착하는데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서 외국인 학생 지원 사무실에 가서 은행 계좌 발급을 위한 서류를 떼줄 수 있는지 물었다. "지금 하는 중이라..., 아직 공식 확인이 어려운 상태라.." 라 하면, "은행 계좌가 안 열리면 집 계약을 못하고, 집 계약을 못하면 우리 가족은 잘 곳이 없어요. 3살짜리 아들도 있어요" 라며 울고 또 울었다. 그리고는 부동산 중개업소를 돌면서 내 기준에 맞는 집이 있는지, 있다면 볼 수 있는지를 물어보며 다녔다. 부동산 중개업소 돌기가 끝나면 중고차 업체를 돌았다. 하다 보면 대략적인 스펙과 가격을 파악할 수 있으리라 싶었다.


하루는 걷다 지쳐 어느 공원 벤치에 걸터앉았다. 하루가 무척 길었는데, 별다른 진척은 없고 매사에 빨리빨리 처리하던 한국과는 모든 것이 다른 이 곳.. 잘할 수 있을까? 우울해지려는 찰나, 눈 앞에 펼쳐진 파란 잔디밭과 넓은 공원이 눈에 들어왔다. 가슴을 가득 채우는 푸른 빛깔이 뭐라 말하기 힘든 맘의 평온을 가져다주었다. 이것이 힐링인 걸까? 나중에 알게 된 그곳은 Royal Victoria Park였고, 우리 가족이 Bath에 거주하는 기간 중 가장 많이 들른 공원이 되었다. 

Royal Victoria Park의 벤치 (출처 : 구글 이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예산에 맞는 작지만 아담하고 포근한 이층 집이 부동산 중개소에 나왔다. 집안이 하얗게 장식되어 있고, 아담한 뒷 정원에는 온갖 꽃들과 나무가 있는 전형적인 영국 가정집이었다. 미룰 이유가 없었다. 집을 본 현장에서 나는 바로 계약하겠다고 집주인에게 이야기했고, 결국 3년간 우리 가족에게 잊을 수 없는 행복한 추억을 쌓은 "우리 집"이 되었다.


3년간 우리 가족을 품어주었던 포근한 집


집이 구해지고 나자 머지않아 나는 신입생 중에 가장 먼저 재학증명서를 받은 외국인 학생이 되었다. 교직원 분의 말씀이 "아주 이례적인 경우라고, 그렇지만 가족들을 길거리에서 재울 수는 없으니.." 그렇게 집은 해결이 되는 듯했다.


그런데,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재정 증명이 되지 않으니, 1년 렌트비를 한 번에 일시불로 지급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나의 경우 회사의 재정 증명서가 있으니, 그럴 필요 없이 3개월 월세 정도 되는 보증금만 먼저 지급하고 나머지는 월세로 지급하기로 부동산 중개업소와 합의를 했다. 그런데, 서류를 확인하는 다른 업체에서 재정 증명서 진위 여부 확인을 위해 이메일로 다시 똑같은 증명서를 보내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외국인이니 그럴 수 있겠다 싶어 연수담당 팀장님께 사정 설명을 드리고 이메일로 증명서를 다시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서류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기 어려우니 1년 치를 다 지급하는 게 좋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부동산에 찾아갔다. 이런 이런 전화를 받았는데, 나는 한국 정부에서 신분을 보장하고 있는 사람이고(공공기관 직원이니 공무원에 준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 기관에서 보증을 한 서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정식 외교 채널을 통해 문제를 제기할 것이고, 그 경우 영국 외교부로 해당 사항이 전달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알기로, 영국 국내법상 차별 금지법이 있고,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상황은 해당 법에 저촉되는 상황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당신들은 당신 정부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을 이렇게 대우하는가? 내가 영어로 이렇게 이야기했던가 싶을 정도로 갑자기 이 모든 말들이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


갑자기 매니저가 잠시 다른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하더니, "정말 미안하다. 해당 업체에서 무슨 착오가 있었던 것 같다. 우리가 알아서 잘 해결하겠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내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쳐 본 뻥카가 통했다. 


이렇게 조금씩 현지에서 살기 위한 준비를 해나가고 있었다. 동양에서 온 한 이방인은 잘 안되면 직접 찾아갔다. 그리고 무언가 부당하다 싶으면 최선을 다해 이의를 제기했다.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에서는 항상 이야기했다.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이지만 최소한의 목소리를 내는데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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