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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5. 2020

밤을 새고, 별을 세고..

2년차 #2 시뮬레이션

내가 있던 방은 낡은 경제학과 건물의 3층 구석방이었다. 매일 열두 시가 되면 시설 관리자들이 노크를 하고, 문을 열어주면 언제 돌아갈 것이냐고 물어보곤 했다. 잘 모르겠다는 내 대답에 수고하라는 인사를 하고 다음 방으로 건너가고 나면 한동안 바람 소리, 빗소리만 들리곤 했다. 2년 차가 되고 나서는 시설 관리자들은 내게 질문을 하는 대신 미소만 짓고 지나가거나, "Oh, You?"라는 인사도 아닌, 안부도 아닌 두 단어를 던지곤 했다.


늘 혼자였다. 간혹 나이지리아에서 온 Sunday라는 친구가 연구실에 같이 늦게까지 남아있곤 했지만, 대부분의 밤을 홀로 보내곤 했다. 가끔씩 너무 적적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내겐 외로움이 사치라고 생각했던 시절이었다. 재정 지원이 2년을 다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최대한 학위과정을 줄여야 했다. 결국 시간을 더 많이 투자하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두 번째 논문을 시작하게 되면서, 좀 더 세련되고 정교한 연구 방법론을 사용해야 했다. 고급 계량 기법을 사용하려면 좀 더 복잡하고 많은 연산이 필요하고, 시뮬레이션 시간이 길어졌다. 컴퓨터가 하루를 꼬박 다 채워서 돌아갔는데도 계산이 다 끝나지 않은 경우가 다반사였다. 결국 계산 횟수를 쪼개서 여러 개의 컴퓨터를 쓰는 방법을 선택해보기로 했다. 학교에 있는 컴퓨터실을 다 확인해보니 도서관 컴퓨터실에 있는 컴퓨터의 성능이 가장 좋았다. 다행히 도서관이 24시간 개방하는터라 시간대별로 가보았더니 밤 12시부터 이튿날 새벽 6시까지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24시간 문을 열던 바스대학교 도서관 (출처: 구글 이미지)


옳다구나 싶었다. 나는 4시간가량 소요되는 계산 프로그램을 짜서 도서관 컴퓨터실에 있는 모든 컴퓨터에서 동시에 시뮬레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도서관 컴퓨터실에는 총 50개의 컴퓨터가 있었는데, 하나씩 계산 명령을 실행하다 보면 첫 번째 컴퓨터의 결과가 4시에 나오고, 마지막 컴퓨터의 결과를 저장하면 4시 반에서 5시가 되었다. 그렇게 약 1주일 밤을 새우고 나니 초기 단계의 결과가 나왔다.


집 앞에 주차를 하고 현관문을 열기 전에 습관적으로 하늘을 보면, 쏟아질 듯 무수한 별들이 지친 나를 위로하듯이 반짝여주었다. 몸은 힘들었지만, 가슴은 상쾌하게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밤을 새고 별을 세던 2년차의 밤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 갔다. 새벽하늘의 별을 보며 매일 다짐했다. 내 자신만을 위한 공부는 하지 말자고..


결국 도서관 컴퓨터실에서 밤을 새던 2년 차의 무모함은 3년 차 때는 고성능 컴퓨터 서비스(HPC, High performance computing)를 사용하면서 일주일이 걸릴 일을 불과 몇십 분 만에 처리할 수 있는 세련됨으로 성장했다. 고성능 컴퓨터 서비스는 6시간 안에 끝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동시에 3천 개 까지 처리할 수 있는 서비스이다. 도서관에서 하루에 50개씩 일주일에 5번 계산을 하면, 250개의 결과를 얻을 수 있는 반면, 고성능 컴퓨터 서비스는 12배의 계산 결과를 이론적으로는 6시간 이후면 얻을 수 있었다. 다만, 사용자의 동시 접속을 허락하지 않고, 내 프로그램을 서버에 전송하면, 선착순으로 계산해서 결과를 사용자에게 보내주는 방식이었으므로 조금 기다리는 수고는 필요했다. 그래도 하루를 넘기는 일은 무척 드물었다.

고성능 컴퓨터 서비스 (출처 : 바스대학교)

지내놓고 나니 무식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이 정말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고생하지 않으면 무식을 벗기 어렵다는 것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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