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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5. 2020

티와 장화

2년 차 #1 British..

일 년 정도 지났다고 영국 생활이 익숙해졌다. 차를 마실 때 홍차에 우유를 섞어서 마실 줄도 알고, 비가 올 것을 대비해서 비옷을 입거나 차에 장화를 넣고 다니는 것에 익숙해졌다. National Trust에서 관리하는 공원에 들러 한두 시간 산책하고 카페에 들러 스콘과 차를 곁들이는 크림 티를 즐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우리가 탕수육을 먹을 때 부어 먹냐 찍어 먹냐를 놓고 부먹파, 찍먹파를 나누는 것처럼, 영국에서도 스콘에 딸기잼을 먼저 바르는지, 아니면 클로티드 크림(달콤한 치즈 느낌의 크림)을 먼저 바르느냐를 놓고 심오한 토론이 오가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스콘 위에 딸기잼과 클로티드 크림을 얹고 홍차를 곁들이면 완벽한 크림티가 된다 (출처:위키피디아)



목욕을 뜻하는 영어 단어 Bath의 기원이 된 도시이자 아름다운 도시 계획으로  UNESCO 문화유산이 된 이 도시의 첫 느낌은 내게는 무척이나 심심했다. 늘 바쁘고 분주한 서울이나 런던과 달리 이곳은 어딜 가도 여유가 있고 한적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중세풍의 건물들이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지만 주변이 모두 푸른 잔디밭과 아름드리나무들로 가득 차 있어서 도시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예쁘지만 지루한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요즘은 여기서 평생 살라고 하면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많은 것이 익숙해지고 편안해졌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자연을 즐기게 된 것이다. 거의 평생을 도심의 빌딩 숲 속에서 살았기에 어린 시절에도 시골에 가면 얼른 집에 가자고 부모님을 조르는 나는 나름 도시 촌놈이었다. 가끔 푸른 숲이 우거진 곳이나 형형색색 꽃이 핀 정원에 가면 '아, 좋구나!' 잠깐 느낀 적은 있지만, 푸르른 녹음과 같이 하는 것이 이렇게 몸과 맘을 평화롭게 하는지는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가끔 런던이라도 들렀다가 Bath로 돌아오면 어찌나 맘이 편해지는지 역시 사람은 자연과 함께 해야 하는구나 싶었다. 마치 자연주의자로 변신한 느낌이랄까?


그러다 보니, 시간만 생기면 영국 곳곳의 아름답다는 곳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한 곳으로 뽑힌다는 웨일스의 로실리 해변을 방문했을 때다. 내게 보통 해변이라 함은 바닷가 바로 앞에 주차를 하고 넓게 펼쳐진 해수욕장에 가서 몸을 담그는 해운대 바닷가가 전부이기에, 가는 내내 어떻게 해수욕을 할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주차는 해변과 한참 떨어진 곳에 하고, 모든 짐을 다 챙긴 채 걸어서 해변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어색함은 둘째치고 걷는 것도 귀찮고 짐을 들고 옮기는 것이 무거웠다. 그런데, 매점 하나 없는 해변에 가보니,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것이 오히려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로실리 해변 외에 우리가 방문한 거의 대부분의 해변이 그랬다. 유명하다는 잉글랜드 북부의 Lake District나 잉글랜드 남서부의 끝자락인 Cornwall 지역도 유명세에 비해 인적이 드물고 자동차로 접근이 어려운 곳들이 많았고 그만큼 자연 그대로, 그 자체로 정말 아름다웠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 중 하나인 웨일즈의 로실리 해변


또 하나의 큰 변화 중 하나는 영어 때문에 오는 불안함과 두려움이 많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 현지 사람들처럼 말하고 듣지는 못하지만 어떤 일을 처리하는데 언어 때문에 불편하다는 생각이 거의 들지 않았다. 물론 여전히 못 알아듣는 경우가 꽤 있고, 생각하는 바를 영어로 정확히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불편함이 사라진 이유는 경험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익숙한 상황에서는 다음 상황에 어떤 표현이나 질문이 나올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다음 해야 할 말을 준비하지 않아도 나도 모른 채 그 말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한국에서 출장 온 친구와 슈퍼마켓에 들렀던 적이 있다. 친구는 해외 영업을 담당하고 있기에 영어 실력은 무척 출중한 편이었다. 그런데, 치약을 사려고 계산대에서 점원이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 난처해하고 있었다. 나는 우연찮게 옆에 있다가 점원히 하는 말을 흘려 들었는데, 2개 사면 50% 할인해준다는 말이었다. 지금은 정확히 단어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었다. 영어를 잘하는 친구지만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결국, 영어 울렁증도 일정 부분은 경험 부족에서 온 증상이 아닌가 싶다.


물론, 내가 경험하고 익숙해진 것들은 아주 지엽적인 일부분에 국한된 것일 테다. 그렇지만, 나와 내 가족이 머문 이곳이 천천히 내 집이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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