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B급 박사 Jun 23. 2020

모든 게 새로운 초보 연구자

1년 차 #4 풋내기

생활은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박사 과정생에게 요구되는 스킬을 갖추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큰 의문부호가 남아 있었다. 박사 과정생이라고 하면 적어도 내가 연구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학생들에게 쉽게 설명해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데이터를 필요에 맞게 가공해서 분석할 수 있는 컴퓨터 실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을 영어로 설명하고 남이 궁금해하는 것들을 영어로 알아들을 수 있어야 했다.


Dr.K의 지도학생 지도 원칙에 따라 2학기 때부터는 Dr.K의 강의 과목 중 하나에 대해서 강의 조교를 해야 했다. 강의 조교가 해야 할 일은 일주일에 한 번씩 있는 보충시간에 매 단원에 나오는 연습문제를 학생들에게 풀어주고 학생들의 질문에 대해 답을 해주면 됐다. 문제 수준을 보니 이미 내가 학부 때 다 풀어봤던 수준으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영어로 되어 있다는 것과 그걸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첫 번째 보충 시간이었다. 이미 다 풀어봤었고 문제도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칠판에 적으면서 문제를 풀어주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횡설수설하다가 정확히 설명을 못했을 뿐 아니라, 학생들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했다. 한 15분가량 헤매고 있었는데, 보다 못한 Dr.K가 중간에 나서서 나머지 강의를 마무리해주었다.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둘만 남았을 때, Dr.K는 나에게 명확히 말했다. "You were very bad." 계속 이런 식이라면 너에게 강의조교를 맡기지 못할 거라고... 그 한 마디를 남기고 연구실로 돌아갔다.


박사 과정 연구실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그야말로 천근만근이었다. "어떡하지?" 내 표정을 본 동료들이 위로해주었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나는 1년 차 때 강의 조교를 맡을 생각도 못했었다고... 위로는 따뜻하고 감사했지만, 나는 내가 맡은 상황을 극복해야만 했다. 두 번째 반 강의는 이틀 후에 있었다. 나는 손으로 적었던 강의 노트를 파워포인트 형식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을 이야기할지 내가 영어로 말하지 못하는 표현은 무엇이 있는지 발견해서 구글에서 찾아보고 암기해두었다. 그리고 강의 시작 전 똑같은 내용을 혼자서 그대로 구현해 보았다. 결국 한 시간가량의 강의를 외워서 한 셈이었다. 다행히 Dr.K도 강의 후에 "오늘은 내가 원하는 정도의 수준을 보여줬네."라고 평가해주었다. 대신, 원래 강의조교 혼자 들어가는 보충 시간에 Dr.K도 참여하기로 했다. 아직 갈 길은 멀고도 멀었다.


내가 성장해야 할 부분은 강의뿐만이 아니었다. 데이터 분석을 위해서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필요했는데 내가 사용하려는 방법론을 구현한 프로그램이 'R언어' 형태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Dr.K는 매틀랩이라는 프로그램을 주로 사용하고 있기에 무언가 하려면 매틀랩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하곤 했었는데, 당장 누군가 해놓은 것을 활용할 수 있는 상황이 되니 무조건 R을 배워야 했다. R은 최근 파이썬과 함께 데이터 분석에 가장 많이 활용되는 프로그램 언어인데 나는 모든 것이 처음이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부터 고민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친해져야 했던  R (출처:구글 이미지)



일단, 구글과 네이버를 뒤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프로그램을 다운로드하고 설치하는지부터 검색했다. 설치가 되고 나니 데이터를 어떻게 불러들이는지 어떻게 변수를 정의하고 프로그램을 짜는지 차곡차곡 설명해 둔 블로그 글들이 가장 좋은 선생님이 되어 주었다. 몇 달을 밤늦게 연구실에게 씨름을 하고 나니 결국 꾸역꾸역 돌아가는 하나의 코드를 완성했다. 그리고 기초적인 결과가 내손에 주어졌다. 그때는 그게 끝인 줄 알았으나, 학위를 마칠 때 보니 그건 시작 중의 시작이었다. 


영어를 처음 배울 때부터 익숙했던 버터 발음의 미국식 영어와는 달리 딱딱 끊어서 발음하는 영국식 발음은 쉽게 적응이 되지 않았다. 커피를 주문하려 카페에 줄을 설 때도, 장을 보고 계산하려고 슈퍼마켓 계산대 앞에 설 때도 긴장해야 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더 겸손한 맘을 갖기로 했다. 나는 외국인이라 잘 모르는 게 당연하니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지 않거나 생소한 단어가 나오면 물어보기로 했다. 슈퍼마켓 계산대에서 Nectar point라는 것이 있길래 물어봤더니 적립 포인트였다. 카드를 만들겠냐고 물어보길래 승낙했더니 일 년 동안 적립한 포인트가 백 파운드 정도 됐다. 

Sainsbury's 슈퍼마켓에서 포인트를 적립해주던 Nectar card (출처 : 구글 이미지)



시간이 점점 흐르면서 내가 영국식 영어를 쓰지 않으면서 영국식 영어에 익숙해지는 데는 시간이 더 오래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 BBC에서 방영하는 영국 하원의 토론회인 Prime Ministers' Questions (PMQ)를 보고, 그 엑센트를 잘 기억해 두었다가 모두가 집에 가고 홀로 남은 연구실에서 소리 내서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척 어색했는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고 나니 캐나다에서 온 친구들의 북미식 영어가 어색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느리지만 아주 조금씩 영국에서의 박사과정이란 항해를 시작하고 있었다.


PMQ의 한 장면, 어디선가 "Order!"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출처 : BBC)



이전 14화 새 출발의 계기가 된 사람들과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