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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2. 2020

난 누구? 여긴 어디?

1년 차 #2 혼란

아무도 무엇을 하라고 하지 않는다. 


처음 박사과정을 시작하면서 지도교수님께 내가 처한 상황을 그대로 말씀드렸다. 나는 학위를 취득한 후에 회사로 돌아갈 것이고, 어떤 학문적인 큰 성과보다는 빨리 이 과정을 마치고 싶다. 내가 받는 재정지원은 2년이 채 되지 못할뿐더러 나는 가족과 함께 머물고 있기 때문에 2년후면 재정적 부담이 있다. 할 수 있다면 3년 안에 마치고 싶다. 


자비로운 내 지도교수님 Dr.K는 그냥 웃었다. 그리고 학위를 마칠 때쯤 이때를 회상하면서 너는 참 야망이 지나쳤다(Too ambitious) 고 하셨다. 나는 솔직한 상황을 얘기했지만, 앞으로 내가 감내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박사과정을 시작했는데, 나는 아들을 학교에 내려다 준 뒤 연구실로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있다가, 대충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고 아들이 학교를 마치는 시간에 맞춰서 아들 학교로 갔다. 온 식구가 도란도란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저녁을 먹고는 다시 학교에 가서 지칠 때까지 있다가 집에 오곤 했다.


그런데 문제는 뭘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연구를 한다고 앉아 있는데 누가 좀 가르쳐줬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무엇을 하라고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관심 있는 주제로 검색해서 내려받은 논문들은 너무 어려워서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다고 큰소리를 쳐 뒀으니 교수님을 만나서 뭔가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나는 10년간 직장생활을 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했던 작업을 간략히 요약해서 보고서 형태로 만드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데이터를 모아서 분석하고, 발견한 것을 간략히 요약한 보고서를 매주 Dr.K 에게 보여주었다. 한 달쯤 지나서 Dr.K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 Boss가 아니야, 회사에서 하는 것처럼 보고서를 만들어서 보여주지 않아도 돼. 굳이 설명이 필요하다면 연필 한 자루와 종이 한 장을 가지고 와서 내 앞에서 쓰면서 설명해도 돼." 아.. 나는 새로운 팀장님 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내 연구를 도와주는 지도교수님과 일하고 있었던 것이다. 몸에 밴 습관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지만, 차츰차츰 대등한 관계에서 내 의견을 Dr.K에게 전달하는데 익숙해져 갔다.


내 생활 패턴은 어쩔 수 없이 가족들에게 남편 없는, 아빠 없는 저녁을 안겨줄 수밖에 없었다. "저녁이 없는 삶은 서울에서나 여기에서나 마찬가지네."라는 아내의 한 마디는 가슴을 후벼 팠으나, 방향도 보이지 않는 박사과정 1년 차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대신, 주말에는 완전히 가족과 함께 하겠다고 다짐했고, 같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아내에게도 뭔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주어야 했다. 매일 바쁘게 직장에 다니던 사람에게 갑작스레 주어진 여유는 탈출구보다는 감옥에 가까웠다. 더군다나 비가 많이 오고 해가 빨리 지는 시기가 다가오면서 아내의 얼굴에는 생기가 사라져 갔다.  영국인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에 다니면 영어도 빨리 익숙해지고 친구도 쉽게 사귈 수 있을 것 같아 수소문해서 찾아간 성경공부는 오히려 역효과였다. 영국 중년 여성들의 영어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알아듣기 어려웠다고 한다. 아마 영어 자체보다는 생활 속에서 자주 사용하는 개념과 용어들이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을 텐데, 이건 뭐고, 저건 뭐고 하면서 차근차근 물어볼 여유가 적어도 그때의 아내에게는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한줄기 희망이 되어준 건 아들이었다. 영어 한 마디 못하고 전혀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 아들은 처음 며칠 동안은 하루 종일 혼자 놀다가 집에 온다는 말로 부모의 맘을 울렸지만, 단 한번 눈시울을 적신 후로 아침이 되면 어김없이 학교에 가기를 서둘렀다. 학교를 다니기 시작한 지 며칠 후 선생님께서 아이의 허리춤에 그림 카드 세트를 달아주셨다. 그림 카드에는 화장실, 물, 장난감, 기타 등등 최소한의 의사소통을 위한 그림과 영어 단어가 적혀 있었다. 네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카드를 선생님에게 보여주면 된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아들도 낯선 이국땅에서 저만의 적응기를 겪어나가고 있었다.


Nursery에 출석한 뒤 정확히 오십일되던 날  학교에서 하는 공연이 있으니 아이가 집에서 유튜브 같은 것을 찾아서 노래와 율동을 연습하게 하고, 공연일 당일에는 학부모들이 모여서 꼭 참석해서 아이들을 격려해달라는 것이었다. 아들과 나는 혹여나 친구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을까 매일 노래와 율동을 또 연습했다. 공연 당일이었다.  잔뜩 긴장한 아내나 나와는 달리 아들은 맨 앞줄에 활짝 웃으면서 서 있었다. 영국 아이들과 비교해서도 덩치가 컸고, 백인들 속 유일한 동양인아이라 시선이 꽤 집중되었다. 아들과 달리 맨뒤에 앉아 있던 나는 아이가 율동을 틀릴 까 봐 맨 뒤에 서서 노래가 나올 때 율동을 같이 해주었다. 그런데 이게 왠 일, 영국 아이들이 나를 보면서 율동을 하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본 아들은 더 신이 나서 큰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힘차게 율동을 따라 했다. 의도치 않게 일일 보조교사가 된 나는 그 일 이후로 선생님들 뿐 아니라 아들 친구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공연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들은 학교에서 친구를 사귀었다면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Dom이라는 친구인데 그 친구는 우리가 영국을 떠나기 전까지 아이의 절친이 되어주었고, 한국에 귀국해서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처음 아이가 영국 학교에 갈 때 주변의 한국 분들이 '마의 3개월'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아이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3개월 정도 되면 아이들은 적응을 하게 된다고,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아내는 그래도 3개월간 아이가 겪을 공포감과 고통이 얼마나 크겠냐고 아이가 학교에 가있는동안 매일 기도를 할 정도로 걱정을 했다. 둘 다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이가 Nursery에서 학교생활을 시작한 것이 큰 축복이었다. 아들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모두 유창하게 대화를 하지는 못했다. 영국 아이들도 이제 막 조리 있게 말하는 것을 배워가는 시기라 전혀 영어를 모르는 아들과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 또래의 아이들은 외국인과 자국인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그냥 친구일 뿐...


3년간 아들의 베프가 되어준 고마운 Dom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부부였지만, 매일 아침 학교 앞에 차를 주차하면 교문까지 제일 신나게 웃으며 뛰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우리보다 훨씬 더 잘해주고 있구나 하는 맘에 힘을 얻었다. 그렇게 세 식구는 서로에게 기대며 이국에서의 첫해를 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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