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차 #3 유럽, 유럽, 유럽
영국에 도착하고 한달도 채 지나지않아 아들의 생일이 다가왔다. 생일파티를 열어도 초대할 친구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 아들에게는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어린이집 친구들과 같이 했던 미리 생일파티를 이미 했다고 설득했다. 아들도 수긍은 되지만 그래도 못내 서운한 티를 감추지도 못하고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하는 애매한 날들이 지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대학 동문들에게 연락이 오기 시작했다. 런던에 있는 동문 모임이 있는데 아내와 우리 가정 소식을 건네 건네 들었다면서 안부를 물어왔다. 그중 한 명은 아내와 대학 졸업 후 10여년간 연락이 끊겼지만 한때 동아리 활동을 같이 한 터라 친분도 있고 오랜만에 이국 땅에서 만난 이 상황이 더욱 반가운 눈치였다. 아들의 생일이 그주 주말인걸 알고, 처음 이국땅에서 외롭게 생일을 맞을 아들과 우리 가정이 맘에 쓰였는지 영국 각지에 사는 동문들이 우리 집에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는 집들이도 한 번 하지 않은 우리 가족이었기에 집에 손님을 맞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웠다. 더군다나 어떤 음식을 대접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걱정이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동문들은 우리 맘을 너무나 잘 안다고 우리가 다 준비해갈 테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라 일단 부딪쳐보기로 했다.
결국 그 날이 왔고, 아내와 아내의 동아리 후배를 제외하면 일면식도 없는 세 가족이 한자리에 둘러앉았다. 영국 한인마트에서 공수해온 밥그릇, 한국 반찬, 조미료부터 준비해온 음식들과 선물로 자동차 트렁크는 제대로 닫히기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일주일 전에 런던에서 주문했다는 아들의 생일 축하 케이크는 사르르 녹을 듯이 달콤했고, 바비큐를 준비해 준 동문은 결국 나의 바비큐 사부가 되었다. 지금까지 나는 그를 '바비큐 장인'이라 부른다.
그날, 정말이지 10년만에 연락이 닿은 지인과 일면식도 없던 이름 모를 대학 동문들의 마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만큼 풍성했고 따뜻했다. Bath가 처음인 가족도 있었고 두 번째인 가족도 있었는데, 전망이 확 트인 Alexandra 공원과 Royal Victoria 공원을 산책하면서 이국생활을 어려움으로 이야기꽃이 피었다. 어떻게 영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고, 무슨 공부를 했으며 어떤 일을 하고 무슨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지 이야기들은 끝이 없었다. 또 한 동문의 아내분과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같은 동문이라 학교 이야기가 나오면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밤이 한참 깊었는데도 헤어지기가 아쉬울 정도로 분위기는 식지를 않았다.
무엇이 우리를 하나로 엮어준 것일까? 한 마디로 대답하기 어렵겠지만, 우리 가족을 향한 그들의 관심과 베풂은 이국에서의 첫걸음에 힘겨워하는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어 주었고, 우리는 나이와 상황을 초월해서 모두 친구가 되었다. 영국에서 사귄 친구들은 영국 생활 내내 우리에게 큰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주었고, 시간만 나면 서로의 집으로 쳐들어가 같이 부대끼며 영국 곳곳을 누비고 돌아다녔다.
아내의 한동대 동문 말고 우리 가족에게 큰 버팀목이 되어준 분들은 Bath 한인교회 분들이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즈음에 런던에서 이주해오신 가족이 계셨다. 남편분은 나보다 몇 살 위이신데 영국 현지 기업에 취업하셔서 대 한국 비즈니스를 총괄하고 계시고, 아내분은 아내보다 몇 살 아래이신데 어린 아들이 하나 있어 여러 가지 공감대가 쉽게 형성될 수 있었다. 그 부부 외에도 영국인 남편과 결혼하셔서 근 40년을 영국에서 살면서 간호사로 복무하시는 권사님이 계셨고, Bath 대학의 학생들이 여러 명 있었다.
매주 교회에 나가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국말로 같이 나누면서 모국어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 감사한 일이구나 새삼 느낄 수 있었다. 학생들과는 종종 학교 캠퍼스에서 마주치면서 인사도 나누게 되었다. 한인 커뮤니티가 있다는 것 만으로 왠지 나와 내 가족이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서 정말 좋았다.
생활이 조금씩 안정이 되면서 다른 유럽 국가로 여행을 가보고 싶어 졌다. 마침 아들 학교도 방학이었고, 우연히 이런저런 영화 얘기를 하다가 '냉정과 열정사이' 얘기가 나왔는데, 이참에 피렌체에 한 번 가보자 싶었다. 고등학교 때 교환학생으로 유럽으로 왔다가 잠시 들른 피렌체가 다시 가보고 싶어 졌다. 이래저래 검색을 해보니 피렌체와 피사가 30분 거리라 피사의 사탑을 실제로 한 번 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못했던 터라 예약하는 것이 생소했다. 일단 여행 스케줄을 짜고 방문할 장소 리스트를 만들고 기타 등등 할 일이 많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거의 자정이 다 되어서 도착한 피사 공항은 우리의 예상과는 좀 달랐다. 항상 모든 것이 질서 정연하고 줄 서는 것이 일상인 영국과는 달리 택시를 잡는 줄 조차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거의 맨 앞에 있던 우리는 오는 순서대로 택시를 타겠거니 하고 있었으나, 거의 30분 만에 도착한 택시는 줄 중간쯤에 서 있던 잽싼 청년이 타고 떠나버리고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숙소에 제대로 도착할 수 있을는지 걱정해야만 했다.
택시 새치기를 몇 번 당하고 나자 오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나도 새치기 대열에 동참하려고 맘 속으로 시동을 걸고 있는 찰나, 점잖은 신사 한 분이 다가오더니 이런 무질서한 상태를 사과했다. 그러고 나서 옆에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이태리어로 한참 이야기하시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모르나 다행히 다음에 도착한 택시에는 우리 가족이 탈 수 있었고 새벽이 깊어서야 숙소에 짐을 풀 수 있었다.
호텔 방 문을 여는 순간 택시 새치기로 상한 맘은 온 데 간데 없이 사라졌다. 말로만 듣던 피사의 사탑이 창문을 여니 지척이었다. 희미한 조명에 비친 사탑은 말 그대로 예술이었고, 이태리식 조식은 "오! 이태리, 예술의 나라"라는 탄성을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식구들이 돌아가며 사탑을 떠 받치는 사진을 한참을 찍고 나서 피렌체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여기저기 찍고 찍으면서 방문 도장을 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나와는 달리, 아내는 천천히 도시를 음미하면서 여유를 가져야 여행의 의미가 사는 사람이다. 굳이 피렌체까지 왔으니 두오모 성당 꼭대기는 올라가 봐야 하고, 시내에 있는 박물관, 미술관은 다 들러야 되는 사람이 나다. 박물관이니 미술관이니 그런 거는 큰 의미가 없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들러 커피 한 잔 마셔주시고, 천천히 거리를 거닐면서 눈에 들어오는 광경을 찍고 분위기에 취하는 사람이 아내다. 다 필요 없고 맛있는 거 먹고 장난감 구경만 실컷 하면 되는 5살짜리 어린이가 바로 아들이다. 그 세명이 함께 있으니 여행 분위기는 더 설명이 필요 없겠다.
그렇지만, 우리 모두가 하나가 되는 순간이 있었으니, 바로 맛집에서 눈 앞에 희귀한 음식들이 펼쳐져 있을 대다. 피렌체는 특별히 우리는 하나로 묶어주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피렌체의 명물 스테이크 집이 그랬고, 숙소 근처의 파스타 집이 그랬으며, 헤매고 헤매 찾아간 피자집이 그랬다. 식사 중간중간에는 우리 가족들이 즐겨 가던 젤라토 집이 그랬고, 아들 입맛에 딱 맞는 달콤한 핫초코를 파는 카페가 정확히 그랬다.
여행 스타일만큼 개성이 강한 세 식구이지만 우리는 영국에 살고 있었고, 유럽에 있었다. 삼십 분을 기다려 십 분도 안되어 포크를 내려놓는 우리였지만 조금씩 행복이라는 길에 접어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