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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급 박사 Jun 25. 2020

Pass confirmation seminar.

1년 차 #5 은혜

시간은 벌써 1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난 무엇을 했는지 잘 모르겠지만, 총 세 편의 논문을 완성해야 하는 박사과정에서 첫 번째 논문의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여름이 다가오자 2, 3년 차 선배들은 네가 관심이 있는 주제에 대한 서머스쿨 (Summer School)을 찾아서 지원하라고 했다. 서머스쿨은 유럽 지역의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활발히 이뤄지고 있었는데, 특정한 주제에 대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박사과정 학생들을 대상으로 심도 있는 세미나를 개최하고 학생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해 준 일종의 특별 과외였다.


학생들에게는 자신의 전공을 심도 있게 학습할 수 있는 기회일 뿐 아니라, 학교에서 여행 경비를 지원해주는 무료 유럽여행의 기회이기에 놓쳐서는 안 될 일종의 복지(?)였다. 다만, 서머스쿨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경제학과에서 개최하는 내부, 외부 세미나에 모두 참석하고 과에서 열리는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필요했다.


다행히 그런 정보를 미리 접했기에, 모든 세미나는 다 참석했으며, 아들의 학교 행사로 한 번 빠지게 되었을 때는 박사과정 주임 교수님을 직접 찾아가 아이 학교 행사로 세미나를 불참해도 되냐고 미리 허락을 받았다. 오히려 이런 자세가 박사과정 주임 교수님께는 나름 어필했었는지, 나는 이태리에서 열리는 "네트워크 연구" 관련 서머스쿨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내가 참석한 서머스쿨은 이탈리아의 베로나 대학이 주최한 행사로 대부분 통계학을 전공한 이태리 학생들이 참석했고, 영국과 기타 유럽 국가에서 몇 명 참석했다. 베로나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도시로 유명한 아름다운 곳으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광장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세미나 장소는 베로나에서도 한참 더 알프스 산맥 쪽으로 올라간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종의 지방 캠퍼스 같은 곳이었는데, 이태리 북부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서머스쿨이 열린 Verona 대학 연수원, 이태리 북부의 Alba di Canazei (스키 휴양시설이 많다)에 위치 (출처 : 구글 이미지)


세미나는 무척 유익했다. 사실 학교 내에서는 금융시장의 네트워크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하면, "아?" 또는 "오!" 다음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도교수님 말고는 내가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서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서머스쿨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비슷한 주제 또는 방식에 익숙하고 관심이 많다 보니 연구 관련 대화로도 끊어짐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다 보니 유일한 동양인으로 동서양의 문화 차이에 대해서 떠들다 보면 시간이 금세 훌쩍 지나가 있었다.


가족들을 영국에 둘 수 없어 같이 이태리로 와서 베니스를 둘러본 뒤 로마에서 헤어져 나는 베로나로 오고 아내는 한국에서 합류한 장모님과 처형과 여행을 하고 있었는데, 나와 헤어지자마자 소매치기를 당해서 지갑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차를 갈아타면서 전화를 했었는데, 울면서 전화를 받는 아내를 어찌할 수 없어 중간 지점에서 다시 로마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아내를 한참 달래고 근처 레스토랑에 들러 배를 채우고 나니 자초지종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아이 혼자 데리고 큰 짐을 끌고 가는 동양인 여자는 소매치기들의 타깃이 될 수밖에 없겠구나 싶었다. 서머스쿨에서 만난 로마 출신 친구는 자신도 여러 번 당했다고 통과의례로 생각하라며 위로해주었다. 그 와중에 아들은 엄마의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엄마, 눈을 감고 상상해 봐. 이게 다 꿈이라고 생각해 봐, 그리고 눈을 뜨면 모든 일이 다 정상으로 돌아올 거야." 아들의 마법 같은 주문 덕분인지 우리 가족은 다시 평화를 되찾고 나는 하루 늦게 서머스쿨에 합류했다.


서머스쿨을 마치고 나서는 바르셀로나에서 가족들과 조우했다. 개인적으로 바르셀로나는 처음이었지만 성가족 대성당을 비롯한 가우디의 흔적들에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도시 곳곳의 활기는 그냥 둘러보기에는 너무 아쉬웠다. 바르셀로나에서 3일을 보낸 뒤 우리의 보금자리인 Bath로 돌아왔다.


많이 배우고, 많이 놀고, 많이 즐거웠지만, 눈 앞에 펼쳐진 시험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가족들을 집에 두고 밤늦게 연구실에서 시간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 순서는 동기들 중 가장 빨랐는데 공교롭게도 내 순서 직전에 업그레이드 세미나를 한 친구는 불합격하는 바람에 내가 느끼는 심리적인 압박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더군다나 내 연구주제가 순수한 경제학 분야가 아니라 경영학과 교수님이 심사자(Examiner)로 결정되면서 어떤 식으로 준비해야 할는지 조차 감이 잘 오지 않았다.

Upgrade 세미나 결과 심사서 표지


시간은 쏜 살 같이 흘러 드디어 업그레이드 세미나가 찾아왔다. 내 연구 주제가 좀 생소한 측면도 있어서 그런지, 내 업그레이드 세미나에는 동기들도 그다지 많이 오지 않았다. 두 분의 심사자 교수님들, 지도 교수님 그렇게 세분을 앞에 모시고 그간 내가 연구한 연구결과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했다. 항상 PT는 실제로 혼자 두세 번 이상은 연습을 해본 상태로 하기 때문에 PT 자체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대신 꼬리에 꼬리를 잇는 질문이 한 시간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내 생각에는 특별히 답변을 하지 못한 질문은 없었지만 어떤 결과가 나올지 알 수 없었기에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잠시 세미나실 밖에 나가 있다가 다시 들어오라고 하시는 말씀에 들어갔더니.. "You passed!"라는 기쁜 소식을 전해 주셨다.


1년이라는 시간에 비해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고, 그런 측면에서 스스로를 대견스럽게 생각해도 좋다는 결과로 매우 흡족한 평가였다. 그렇게 나는 Ph.D Candidate으로 업그레이드되었고, 새로운 한 해를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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