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차 #4 도전
인생지사 새옹지마이기도 하고, 호사다마이기도 했다. 좋은 일이 있고 나면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쳐왔다. 예상이 되던 어려움도 있었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도 있었다. 힘든 일은 재정적인 면도 있었고, 사람과 관련된 것도 있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그 힘든 일들은 다 해결되었다. 그 시간을 버티는 것은 어려웠지만, 어려움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회사의 재정지원이 끝났다. 최초에 유학을 나올 때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재정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여러 방법으로 학교에 요청을 해보았으나 외국인 학생에 대한 학교의 재정지원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려웠다. 동료 학생들 중에는 서빙 같은 아르바이트를 하는 친구도 있었는데, 생활비를 벌기 위해 그렇게 시간을 보내기보다는 차라리 학업에 집중해서 빨리 학위를 마치는 것이 유익하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학위 과정을 빨리 마치는 것이 재정적으로 큰 유익이 될 수 있는 것이 학위 과정의 마지막 1년은 글쓰기에만 집중하는 Writing-up 기간이라 하여 별도의 논문 지도를 받지 않고 그에 따라 등록금 납입 의무가 없어진다. 일 년 등록금이 만 오천 파운드 정도 되는데 원화로는 약 2천3백만 원가량이다. 논문 진도를 빨리 나가서 Writing-up으로 전환할 수 있다면 등록금을 아낄 수 있는 셈이다. 물론 연구실과 컴퓨터 등 시설 사용을 위한 최소 비용은 지불해야 한다.
Dr.K와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했다. Dr.K는 정말 원칙주의자였다.
네 상황은 잘 알겠다. 그렇지만 나는 너의 상황 때문에 네 논문의 질을 타협하지는 않을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으면 Writing-up 전환은 불가능하다. Writing-up 전환을 위해서는 초기 단계 버전이라도 완성된 세 편의 논문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Dr.K의 조건이었다.
세 번째 논문의 연구결과가 아직 나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맘이 급해지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가는 시간이 점점 늦어지고 집에 들어가서도 논문 생각이 가시지 않아, 나도 모르게 가족들에게 짜증을 내는 상황이 많아졌다. 그럴수록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렇지만 세 편의 논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학교 교칙상 Writing-up 전환을 위한 최소 기간은 2년이었다. 즉, 입학 후 적어도 2년은 지나야 Writing-up 신청이 가능하고, 지도 교수와 박사과정 책임 교수님의 동의가 있어야 Writing-up 전환이 가능했다. 정확히 2년이 될 때쯤 내 논문 세 편의 초안이 완성되었다. Dr.K는 많이 놀라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즉각적인 전환 승인은 허락해주지 않았다.
네 논문이 이렇게 빨리 진행될 줄 몰랐다. 너의 성취가 나는 자랑스럽다. 그러나, 나는 네 논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정밀하게 검토하지 못했고, 너도 정밀한 점검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지금 바로 전환되었다가 라이팅이
중간쯤 진행된 시점에서 오류가 발생된다면 네가 학위를 정상적으로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내 학생 중에 그랬던 경우도 있다. 따라서, 나는 네가 약 삼 개월 동안의 시간적 버퍼를 가지기를 제안한다. 그것이 네게도 유익이 되리라 믿는다.
지도교수의 제안을 거절하기는 쉽지 않았다. 그가 승인 권한을 갖고 있기도 하려니와 그의 주장을 반박할만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연락을 주신 부모님께 상황을 말씀드렸는데, 아버지께서는 국민연금을 받기 시작하신 후 그간 모아두신 돈이 내 삼개월치 등록금 정도 된다시며 박사과정 등록금의 대미를 장식해주셨다.
금액으로는 그리 크지 않을 수 있었지만, 아들의 박사과정에 기여해주신 아버지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유학을 올 때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외국 가면 한국사람 조심해라"였다. 또 하나는 "한국 교회 다니지 마라."였다. 그만큼 먼저 자리 잡은 한국 사람들이 처음 나온 한국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사기가 많고, 안타깝게도 그런 사건이 발생하는 장소가 한국교회가 많다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우리 가족은 꾸준히 한국교회를 나갔다. 일주일 중 편하게 한국어로 이야기하고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 외에도 Bath에 거주하는 한국인들과도 최대한 가깝게 지내려고 노력했다.
우리가 편하게 보여서였을까? 특히, 아내에게 무례를 범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주변에서 느끼기에는 처음 이주해와서 향수병과 외로움을 겪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감정의 잔재가 아내에게 전달되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내가 교제하는 한국인중에 나이가 제일 어린 축에 속했고, 자기 얘기를 적극적으로 하기보다는 주로 남 얘기를 들으면서 맞장구를 쳐주는 스타일인데, 이 때문이기도 한 것 같기도 했다. 몇 번 비슷한 일을 겪다 보니 아내가 받는 스트레스도 적잖았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사람과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 외에는 그 좁은 사회에서 갈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게다가 우리가 출석하는 한국교회에서는 교역자 교체 건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교회는 있는데 교역자가 없는 상황이 꽤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꽤 오랜 기간 출석한 성인이 몇 없었기에 그 몇이 교회 운영과 예배 준비 같은 일들을 다 책임져야만 했다. 교회 일과 교역자와의 관계는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뭔가 많이 부족한 그 상황이 지내놓고 보니 더 큰 축복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남아 있는 우리는 똘똘 뭉쳤다. 매주 서로 집을 왕래하고 대화를 나누고, 성경공부라는 이름으로 모여 서로의 상처와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친 형제자매 같은 사이가 되었다.
힘들고 어렵지만, 결국은 축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고난이라는 두 얼굴의 친구를 좋아해야 하는 걸까? 피해야 하는 걸까?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외면하는 그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