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3 회고
시험 점수가 필요한 영어 외에 유학 준비에 가장 큰 힘을 들이는 부분은 SOP이다. SOP는 Statement of Purpose의 약자인데, 일종의 자기소개서이다. 그렇다고, 저는 화목한 가정에서 태어나 엄부자모의 사랑을 듬뿍 받고...로 쓰면 절대로 안된다.
구직할 때 자기소개서에 왜 내가 이 회사에 필요한 인재인지를 어필하듯, 나는 이러이러한 경험과 능력을 갖고 있으므로 귀 학교에서 공부하기에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으며, 귀 학교의 강점과 나의 연구 관심사가 일치하므로 나를 꼭 뽑아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게끔 써야 한다. 치밀하게 박사과정 준비를 하는 분들은 각 학교별 장단점을 미리 파악하고 자신의 연구 관심사와 일치하게끔 쓴다고 한다.
어찌 됐든, SOP를 쓰기 위해서는 내가 갖고 있는 경험과 장점들을 리스트업 하는 작업이 필수이다. 9년간의 직장생활, 2년간의 대학원 생활, 또 2년간의 군 생활, 4년간의 학부시절, 마지막 3년간 고등학교 시절까지 도합 20년의 내 인생을 돌이켜보면서 SOP에 적을만한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하얀 종이에 써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뭘 써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회사에서 했던 일들, 학교에서 공부한 것들, 뭔가 좀 자랑해볼 만한 것들을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하다 보니 일주일이 금방 갔다.
회사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는 과거를 돌이켜볼 일이 사실 잘 없었다. 그 날 그 날 업무에 쫓겨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면 집에 와서 곯아떨어지기 일쑤에다 주말에는 어떻게 하면 한 숨이라도 더 잘까 하다 보면 금세 또 월요일이었다. 결혼 후에 아이가 태어나다 보니 내 시간은 없고, 육아와 가사에 영화 한 편 제대로 볼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아! 내가 몇 년 전에 이런 일을 했구나" 싶고, 그때 일을 돌이켜 보니 갑자기 그때 느꼈던 감정들이 떠오르고, 같이 일하거나 공부했던 친구들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해졌다. 하릴없이 평소 잘 연락도 하지 않던 친구에게 연락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면서 괜히 센티멘탈해지기 일쑤였다. "앗! 이럴 때가 아니지!" 하면서 정신을 차려보면 벌써 새벽이었다.
그래도, 그 과정을 거치면서 적어도 "내가 성실히 살아왔구나."라고 느낄 수 있었다. 학위 과정에 지원하는 일이다 보니 학업적인 부분과 연구와 관련될만한 회사일을 쓸 수밖에 없기에 열심히 공부한 사실들, 피 터지게 일한 내용들만 적혀 있지만, 그 외에도 나 스스로에게 뿌듯할만한 다짐과 고민들이 고스란히 다 기억났다. 첫 출근 때부터 "절대로 다른 사람들보다 덜 치열해지지 말자."라고 결심했던 매일 가장 먼저 출근하는 신입사원이었다. 임신한 아내를 두고 열두 시 넘어 퇴근한 뒤 순산을 위해 새벽까지 같이 걸으면서 "좋은 아빠가 되자."라고 되뇌었던 나름 최선을 다한 아빠였다. 이런저런 회사의 굵직한 대책을 마련할 때 기꺼이 맨 뒤에 서서 사무실을 밝혔던 우직한 중견직원이었다.
번뜩이는 두뇌와 국가대표급 스펙을 지닌 지원자는 아니지만, 적어도 내 삶에 있어 부끄럽지 않았으면 되지 않을까란 자기 위안과 경쟁자들의 화려한 이력서에 작아지는 자아와의 충돌은 드물게는 삼사일만에, 잦게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작은 내 가슴속에서 불을 뿜곤 했다.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내 SOP는 회사 내에서 가장 믿을만한 영어 교열사님께 부탁드려 교정을 받았다. 부끄러운 이야기를 공개하기가 민망했으나, 적어도 영어라도 괜찮아야지 하는 맘에 부끄러움을 감추는 수밖에 없었다.
언젠가 다시 SOP 같은 글을 쓰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