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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Nov 05. 2019

지금 브라자를 벗은 채 거리로 나서려는 당신에게

저기, 잠깐만요.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새로 맞춘 양복을 뽐내며 입고 출퇴근한 것도 잠시,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양장이 주는 갑갑함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숨을 막는 것 같은 넥타이와 더운 여름 겨드랑이를 흥건히 적시는 재킷, 뒤꿈치가 까지는 구두 그 모두가 싫었습니다. 그러던 언젠가 문득 이 양장 차림은 남자를 구속하는 기호로 느껴졌습니다. 목부터 엄지발가락까지 나를 조이고 있는 그 양장은 '경쟁에서 남을 이겨야 하고', '좋은 성과를 내야 하고', '틈을 보여선 안 되고', '능력을 인정받아야 하고',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울화를 참아야 하고', '믿음에 부합해야 하고', '듬직해야 하는' 남자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말이죠.



만약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거래처를 만나는 날, 중요한 미팅이 있는 날 편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간다고 해봅시다. 어떻게 될까요. 정장을 갖춰 입는 다는 것은 근대부터 이어져온 사회적 약속이자 함께 일을 하는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의의 표현이 아닐까요. 우린 중요한 자리일수록 의상뿐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가짐도 조금 불편하지 않나요. 우리는 상대방의 몸짓과 말투 뿐 아니라 의상으로도 상대방이 나를 존중하는지 그렇지 않은 지를 어느 정도 판단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무릎 나온 츄리링에 쪼리를 신고 왔다면 둘 중 하나입니다, 내가 굉장히 편한 x알 친구이거나, 나를 존중하지 않거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법전에 쓰여진 법체계뿐 아니라 사회 구성원 간 수많은 암묵적인 합의와 약속의 그물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브라를 입지 않고 상대방에게 유두를 내놓는 행위는 어떤가요.



'노 브라'에 조금 더 직접적으로 다가가는 예를 들어 봅시다. 만약 페미니즘의 반동으로 '남자들이여 더 이상 우리를 짓누르고 있던 책임감과 능력, 강한 남성성을 모두 내려놓자!'는 운동이 벌어진다고 해봅시다. 그리고 그 남성성을 해방하는 정치적 의사 표시로 팬티를 벗고 레깅스를 입고 다닌다고 가정해봅시다. 모르긴 몰라도 타이트한 레깅스 밖으로 툭 튀어나온 불썽스런 성기가 거리에서, 지하철과 버스 안에서, 직장에서, 학교에서 많은 이들에게 굉장한 불쾌감과 혐오감을 주지 않을까요. 만약 여성들이 "보기 싫고 혐오스러우니까 그런 착장을 관두라"라고 요구할 때, "이건 지금까지 남성을 구속하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운동이다, 당신이 뭔가 이래라저래라 하냐, 그건 그렇고 왜 남의 성기를 쳐다보느냐, 이건 시선 강간이다"라고 되묻는다면 어떻게 반응하시렵니까. 조금 폭력적이고 무책임하고 예의없게 느껴지지 않나요.



만약 여성 권리 신장을 위한 방법이 어깨에 흰 깃털을 꽂는 다던지 혹은 젖가슴 부분에 황금색 하트 금박 스티커를 붙인다던지 하는 방식이라면 그런 운동 방식에 의의를 제기할 사람은 크게 없을 것입니다(그것조차 불편해하는 남자들도 있겠지만). 그런 옷차림이 누구에게도 불쾌감과 혐오감을 주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타이트한 상의에 볼록 튀어나온 유두를 드러낸 채 내 앞으로 걸어온다던지, 지하철에 앉아 있을 때 내 앞에 바짝 서 있으면 상당한 불쾌감과 혐오감, 불편함을 안겨 줍니다. "그러게 안 쳐다보면 되지 않느냐?" 혹시 묻는다면 "공공장소에서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고 있다는 생각은 안 하느냐, 왜 내가 내 시선을 내 마음대로 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회피해야 하느냐? 당신이 내 시선을 강제할 권리가 있느냐. 당신이 내 시선에서 수치심을 느끼는 만큼, 당신의 옷차림에서 수 많은 이들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시렵니까. 





'노 브라' 운동이 논란인 이유,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정치적 의사 표현을 하지 못하도록 제한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의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 의사 표현 방식이 공공장소에서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과 불쾌감, 혐오감을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정치적 의사 표현이 중요한 만큼 타인의 행복권도 중요한 것 아닌가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여자 주인공이 집에 들어오자마자 브래지어를 벗으며 "이제 좀 살 것 같다"라고 말하는 신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것은 비단 브래지어뿐만 아니라 치마나 구두를 벗을 때도 동일한 해방감을 느끼지 않나요? 나를 가두던 모든 외피를 벗고 파자마를 입으면 궁극의 해방감을 느끼지 않나요? 여성이 브래지어를 벗으며 느끼는 그 해방감은 남성도 정장을 벗고 외투를 벗고 벨트를 푸르며 똑같이 느낍니다. 직장에서, 회사에서, 학교에서 우리는 타의든 자의든 나의 본래 모습과는 다른 여러 사회적 가면을 쓰고 생활합니다. 내가 아닌 모습으로 여러 시간을 생활하고 남과 부대끼며 생활한다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죠. 



집에 들어와 외출복을 벗어던지고 파자마를 입는 행위. 그 행위는 단순한 환복 행위가 아닙니다. 외출복이라는 물리적 외피뿐 아니라 나를 옭아매던 사회적 속박을 벗어던지는 하나의 '의식'입니다. 갑갑한 사회인에서 하나의 개인, 자연인으로 돌아가는 해방의 의식인거죠.



언뜻 생각해보면 사회적 가면을 쓰고 내가 아닌 모습으로 사회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옳지 않아 보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죠. 그 사회적 가면이 여간 불편하고 부자연스럽다는 것이 아니니까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도 예외가 아니고요. 외딴 산골에서 외부와 소통을 단절한 채 홀로 살아가는 '자연인'이 아닌 이상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회적 가면은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아마도 무리 지어 다니며 동굴에서 생활하고 먹이를 찾아다녀야 했던 선사시대 원시인들도 사회적 가면의 굴레에서 해방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매력을 어필해 선택하거나 선택을 받아 짝을 짓고, 다른 남성보다 사냥을 잘해 아내와 자식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단체 생활을 위한 기초적인 행동 양식, 즉 양보하고 배려하고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암묵적 규율이 그 당시에도 존재했을 테니까요.






심리분석학자 칼 융은 그런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갑갑하고 불편한 사회적 가면에 대한 고민은 현대인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칼 융은 사회적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을 찾아야 한다고 했지만 또한 그 페르소나가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페르소나를 벗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죠. 나이가 어느 정도 들어 남성은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는 여성성인 '아니마'를, 여성은 그 반대로서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찾을 때 진짜 나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한 사람의 성숙한 어른, 건강한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타인과 사회를 위해 필연적으로 써야만 하는 사회적 가면을 거부하고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편하고 갑갑해도 사회적 가면의 필연을 인정하고 자연인으로서 나와 사회적 가면 간 긴장과 균형을 이루는 법을 아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그 사회와 개인 간 긴장 해소의 방법으로써 놀이와 예술이 큰 기능을 수행합니다. 예술에게 합리성을 강요하는 것이 어불성설인 이유이죠, 예술에게 또 다른 사회적 가면을 씌우는 것이니까요, 쿨럭). 



브래지어가 불편한 당신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혹시 당신은 사회인으로서 지켜야 할 사회적 예의와 약속이 불편하고 갑갑한 것인데 그걸 '여성 해방'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ps. 

혹시 알몸으로 수영을 해본 적이 있나요? 모든 사회성, 책임감, 예의, 에티켓, 수치심을 벗어던지고 태초의 동물로 돌아가 자연과 하나가 된 듯한 그 해방감이 주는 짜릿한 카타르시스. 그것은 경험해본 사람만이 압니다. 어쩌면 브라를 착용하지 않은 채 거리를 활보하는 것에서 그런 비슷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짐작해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알몸 수영이 정해진 구역이나 아무도 없는 지역에서만 가능한 것은 그것이 예의이자 사회적 약속이자 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해방이라는 정치적 의사 표현은 유두를 드러내고 거리를 활보하는 것보다 더 멋진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정 브라를 벗고 해방감을 느끼고 싶으면 최소한 유두에 스티커라도 붙이면 안 될까요.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ps.

참고로 한국에서만 노 브라가 억압 받는다고 생각하는 당신. 제가 지금 지내고 있는 뉴욕, 미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도시에서도 노 브라는 소수의 용감한 여성들이 감행하는 행위입니다. 서울보다 많은 이들이 노 브라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만 그들을 보는 시선이 곱지만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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