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ose Aug 11. 2020

류호정 의원의 원피스

노브라 운동과 예의, 그리고 격식에 대해서


주민등록증을 분실해서 얼마 전 새로 발급받으러 동사무소에 갔습니다. 각종 업무를 보러 온 주민들로 내부가 꽤 복잡했는데 한 가지 제 눈에 띈 것은 누가 주민이고 누가 동사무소 직원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데스크 뒤에 있으니 저 사람이 직원인가 보구나 짐작하지만 화장실을 간다거나 물을 마신다거나 하는 둥 자리를 뜨면 주민과 구분이 전혀 되지 않았습니다. 동사무소 직원 모두 티셔츠에 면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죠. 격식을 파괴하고 편한 복장으로 업무를 보는 것도 좋지만 과연 그것이 좋은 것인지 한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도 앞치마나 유니폼을 입어서 최소한 고객과 직원을 구분하지 않던가요.



얼마 전 류호정 의원이 파격적으로 국회에서 원피스를 입고 등원해서 논란을 빚은 적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개인의 자유다 누군가는 예의 없다 설왕설래했죠. 저는 이것이 궁극적으로 현재 한국 사회가 지녀야 할 기본적인 예의와 격식, 그리고 전통의 합의에 관한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전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노브라 운동'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https://brunch.co.kr/@josetmojito/160 꽤 긴 그 글의 핵심은 브래지어를 하지 않는 것은 성적 해방의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사회적 약속과 예의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장을 함에 있어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TPO(Time, Place, Occasion)가 있습니다. 장례식장에 갈 때는 흰색과 검은색 옷을 입어야 한다거나,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이나 미팅, 혹은 선을 보는 자리 등에선 예의와 격식을 갖춰 입어야 한다는 것 말이죠.



우리나라는 일반적으로 '파격' 자체를 맥락에 상관없이 꽤 가치 있는 행동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사실 역사적 맥락이 있습니다. 안 그래도 유교적 영향이 강한 조선의 경직된 사회 구조와 문화에 일제의 군국주의가 스며들어 그 경직성이 배가됐고, 해방 후에는 권위주의 정권이 오래 지속되며 사회 전반에 공고화됐죠. 온 사방이 꽉 막힌 것 같은 답답함. 시대가 흐르면서 사회를 경직시키는 많은 관습과 관례, 위계와 권위 등은 좋지 않은 역사적 매락으로부터 비롯된 산물이며 배척해야 할 잔재라는 인식이 생기게 됐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언제부터인가 그런 경직된 '격식', '권위', '전통', '관례'를 파괴하는 것이 사회가 나아가야 할 옳은 방향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사실 정치적 행보와도 맥락이 닿아있습니다. 일제와 보수를 일방적으로 연관시키며 보수 정권부터 이어져 온 많은 격식, 권위, 관례는 극복하거나 파괴해야 하는 대상으로 생각했죠. 그 시작은 역시 군부정권 이후 YS의 문민정부 시절부터 이지만 본격적인 탈권위와 파격, 즉 '과거의 해체'의 시작은 일제시대나 군부 정권과 일절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 386 세대가 정치의 전면에 나선 노무현 정권부터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움직임은 유연하고 개방적인 사회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작업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 사회가 과연 어느 선까지 파격을 허용할 것인가에 대한 깊이 있는 논의 없이 전방위적으로 해체가 진행됐다는 것입니다. 마치 조선-일제-군부로 이어져 오는 동안 형성된 모든 한국의 문화와 사회적 유산을 거세하려는 듯 보였습니다. '격식', '권위', '위계', '전통'은 조직이나 사회가 유지되기 위해서 어느 정도는 반드시 필요한 가치입니다. 과거와 이어진 사회적 끈은 너무 굵어도 문제지만 너무 얇아도 문제입니다. 정체성은 기억으로부터 발현됩니다. 한 사회의 정체성을 담지하고 있는 과거와 전통의 상실은 곧 그 사회의 정체성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문제입니다. 좀 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모든 파격이 허용된다면 조직이나 사회에서 벌어지는 모든 중구난방이 파격이라는 이름으로 허용될 것입니다. 끈이 떨어진 연이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정처 없이 휩쓸려 다니는 것처럼 조직이나 사회는 여기저기서 수시로 튀어나오는 정체불명의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지느라 녹초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언뜻 거부감을 가질 격식, 권위, 위계, 전통 등은 그 나름의 분명한 정당성을 지닌 가치를 지닙니다.



회사의 운명이 달린 중요한 협상 자리에 '파격'이란 이름으로 하와이안 셔츠에 쪼리를 입고 가는 게 합당한 일일까. 처음으로 결혼할 남자의 부모님을 뵈러 가는 자리에 유두가 도드라지는 노브라에 레깅스를 입고 가는 게 '파격(혹은 페미니즘)'일까. 그렇다고 이야기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자리와 상대, 업무에 걸맞은 행동, 즉 격식과 예의를 우리 모두는 알고 있으니까요. 그러한 기본적인 행동에 복장도 포함됨은 당연한 일입니다. 복장은 단순히 나체를 가리는 옷감을 걸치는 행위를 넘어 어떤 자리에 누구와 있으며 그 자리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내가 생각하는 지를 겉으로 드러내는 사회적 함의를 지닙니다. 



그것이 바로 대통령이 항상 불편하지만 양복을 입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대통령이 된다고 어느 날 갑자기 양복이 잠옷처럼 편할리 없습니다. 대통령의 복장은 그가 행하는 업무에 걸맞은 격식과 예의의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이 국회에서 동료 의원들과 함께 법을 통과시키는 업무를 보는 것은 어떨까요. 저는 직업을 대함에 있어 '돈' 만큼 중요한 것이 '직업윤리'와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가진 직업, 내가 하는 일이 비록 내 개인적 부를 축적하기 위함이기는 하나 그것과 별개로 직업이 지닌 사회적 책임과 역할, 그리고 그 직업을 대하는 개인의 책임감 역시 하나의 가치로써 매우 중요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무형의 가치에 대한 인식과 자각은 나라를 발전시켜야 하는 대통령이나 환자를 살려야 하는 의사 등 특출 난 몇몇 직업인만이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장은 그가 벌어가는 돈과 별개로 내 배에 승선한 승객을 모두 안전하게 운송해야 한다는 책임감, 즉 직업윤리를 가져야 하며, 그 책임감과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불편함이나 개인적 불이익도 감수하겠다는 직업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직업윤리와 의식은 그 성질이나 경중만 다를 뿐 직업을 가진 이라면 모두가 지녀야 할 사회적 약속입니다. 초등학생 조차 건물주가 되고 싶어 하는 동방의 천박한 배금주의의 나라 대한민국에서는 그런 무형적 가치나 사회적 약속에 대한 인식이 굉장히 미비하지만 자본주의의 맹아인 미국 조차 월급과 별개로 직업의식과 윤리를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은 교육이 이뤄집니다.



그렇다면 국회의원이 마땅히 인식하고 지녀야 할 직업윤리와 의식은 무엇일까. 국회의원은 한 명 한 명이 개별적 헌법기관으로 대우를 받는, 국가적으로 매우 중요하고 엄중한 직업입니다. 그들이 만들고 통과시키는 법은 국민 모두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고 국가를 위태롭게 할 수도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접근할 수 없는 중요 정보나 기밀을 취급하며 각종 주요 국가기관을 감사합니다. 그런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행사하는 무거운 권리와 의무를 항상 엄중히 인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중요하고 엄중한 업무를 처리하는 장소인 국회에서 일할 때는 어떤 마음가짐을 지녀야 할까. 어떤 복장이 그런 직업윤리와 의식을 표현해야 하는 것일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나름의 답이 떠오를 것입니다.



문제가 됐던 류호정 의원이 입었던 원피스가 과연 국회의원이 지닌 엄중함과 책임감을 대변하는 격식 있는 복장이었을까. 원피스도 동네 마트에 갈 때 입는 원피스부터 격식 있는 자리에서도 입을 수 있는 원피스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습니다. 류 의원이 입었던 원피스는 어디에 해당하는 원피스였을까요. 과연 류 의원은 격식과 전통을 파괴하는 선택을 하기에 앞서 국회의원이 지닌 엄중한 직업윤리와 의식에 대해 고민을 해보았을까요. 



우리 사회는 단순히 원피스 착장에 대한 말초적인 반응보다는 그 현상의 기저에 깔린 근본적인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파격'과 '격식' 간 어느 정도의 긴장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현재 한국 사회에 적절한 것인지, 파격을 이룬다면 그 형태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말입니다. 사실 이러한 논의는 지금 한국이 처한 수많은 과제들의 공통된 연장선이기도 합니다. 우리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수많은 자잘한 논란과 문제들은 사실 과거를 깡그리 지워버리고 부정해버린 탓에 정체성의 많은 부분이 상실되어 버리고 그로 인해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기 때문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정체성과 가치, 비전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버린 한국 사회는 끈이 끊어져버린 연처럼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아무 맥락과 목적 없이 휩쓸리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과연 한국은 어떤 나라였나요, 어떤 나라인가요, 어떤 나라가 되고 싶나요.



이 글의 시작에서 던진 질문. 동사무소 직원의 복장이 동네 주민과 똑같아도 될까에 대한 저의 질문은 "아니요"입니다. 편함을 추구하는 것이 언제나 정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순간 어느 장소에서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경우가 있는 법입니다. 양복이 과하다면 최소한 은행 직원들의 편한 유니폼처럼 정해진 옷을 입는 것이 예의와 격식을 차린 공무원의 복장이 아닐까 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과연 어느 선까지가 '정치적 올바름'일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