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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Nov 16. 2021

열린 생각에서 점점 사라지는 나로




예전에는 내가 맞다고 확신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같잖게 책 몇 권 읽고 신문 몇 개 읽었다고 그게 세상의 전부인양 생각은 비대해졌고 그 뚱뚱해진 생각을 참지 못하고 이리저리 주절거려댔죠. 다른 이가 저의 의견에 동의하면 그 동의는 오직 자기 확신을 강화시켜 주는 동인으로 작동했고 동의하지 않으면 답답함에 그 사람을 어떻게든 설득시키려고 했습니다. 비대해진 자아와 그에 따른 선민의식. 모든 게 확실했던 그 때. 그땐 어떤 일을 해도 성공시킬 것처럼 자신에 차있었습니다. 내가 옳으니까요.



하지만 더 보고 배우고 실패를 경험하면서 제가 확신하던 많은 사실들이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 비록 그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여러 이면이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내 의견을 강화시켜주는 토대인 사실 혹은 진실은 사실 그 모든 것에 이면이 존재하고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불확실성"에 눈을 뜨게 됐습니다. 의견은 사고로부터 나오고 사고는 사실로부터 비롯됩니다. 그 논리 사슬의 출발점인 사실이 불확실하면 의견이 확고할 수 없습니다. 내가 언제든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은 점점 강해졌습니다. 흔들흔들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토대 위에서 비대했던 자아는 이내 작아지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열린 생각, 열린 마음이라는 걸 갖게 되었습니다. 아집을 버리고 나와 다른 의견을 적극 수용하는 자세는 사고의 지평을 확장시켜주는 것 같아 꽤 마음에 들었습니다.



문제는 한때 비대했던 자아가 작아지기 시작하자 멈추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자아라는 녀석은 꽤 마음에 들던 적당한 사이즈를 지나 이제는 너무 작아져 저로 하여금 어디에도 정답은 없고 그 어떤 것도 정답이 될 수 없다는 일종의 허무주의로 데려가고 있습니다. "나의 생각과 타인의 생각 간 최적의 균형점"은 어느 부근일까. 모호해져버린 경계선 위에서 방황 중입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은 마땅히 수용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는 나만의 뚜렷한 기준을 갖고 싶지만 쉽지 않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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