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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se Nov 24. 2022

한글의 사막화

알러지와 알레르기, 그리고 공허한 한글 사랑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예전에는 외래어 '알레르기'를 '알레르기'로 표기하고 발음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알러지"로 불리기 시작했고 요즘은 알레르기라고 말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제 기억이 맞다면 MB 정권 즈음이 그 시작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존 표준 외래어를 영어식으로 "혀를 꼬며" 표기하고 발음하는 '뒤틀린' 사회 현상 말이죠. 정권 차원에서 시작한 영어 공교육이 한창 이슈가 됐었고 "오렌지"를 "어륀지"로 발음해야 된다는 식의 담론이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더랬죠.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알레르기"가 "알러지"로 둔갑하게 된 것 말이죠. 잠시 궁예로 둔갑해보자면 그 당시 "알러지"로 말하는 문화는 마케팅이나 패션에서 "있어 보이기" 위해서 사소한 단어들도 영어로 말하는 그런 심리들이 있었던 것처럼 보였습니다. "스타일", "쉬크", "엘레강스", "쿨" 등 쓸데없이 외래어/외국어를 남발하는 것 말이죠. 


예전에는 그래도 뚜렷한 외국어, 외래어 표기법이 있었고 모두 준수하는 분위기였다면, 요즘은 "각개전투"를 벌이는 모양새입니다. 쓰는 사람 멋대로 본인들이 들리는 대로 표기한달까요. 예를 들면 예전에는 모두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로 발음하고 표기했었다면 요즘은 심지어 언론에서도 "리어네도 디케프리오" 식으로 중구난방 쓰면서 외국어/외래어 표기의 기준 자체가 사라진 느낌입니다. 통일된 기준 없이 질서가 파괴된 뭐랄까 한국어의 포스트 모더니즘 같달까요^^;




각설하고 '알러지'는 '알레르기'로 쓰고 발음하는 것이 맞습니다. 왜냐? 외래어를 쓸 땐 그 언어가 나온 본토(!)의 발음으로 쓰는 게 원칙이거든요. 알레르기는 독일어 유래로 쓰기 때문에 알레르기로 쓰는 것이 맞는거죠. '알러지'는 미국 사람들이 '알레르기'를 자기들 "마음대로" 말하는 미국식 발음인거죠. 미국에서 "알레르기"라고 말하면 못 알아듣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실을 아는 분들이 극히 드물죠 ). 우리가 포르투갈 이름인 "호날두"를 미국식 발음인 "로날도"로 발음하지 않고, 이탈리아어인 "로마"나 "피렌체"를 영어식 발음인 "롬"이나 "플로렌스"로 발음하지 않고, "메르세데스 벤츠"를 "멀시디스"라고 발음하지 않고, "샤넬"을 "싀-넬"이라고 발음하지 않는 것처럼 "알레르기"는 영어식 발음인 "알러지"가 아닌 "알레르기"로 발음하고 쓰는 게 맞는 것입니다. 통일된 기준 없이 각자 들리고 느끼는 대로 말하고 쓰면 어떻게 될까요?


하지만 언어란 또한 끊임없이 진화하는 생물 같죠. 시대와 사회가 변하면서 언어도 자연스럽게 변하기 마련입니다. 옛 기준을 무조건 따라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장면" -> "짜장면"처럼 아무리 표준어가 존재한다고 해도 대다수의 사람들이 광범위하게 사용하는 언어가 결국 표준어를 대체하기 마련이고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다만 그 진화의 방향성이 문제일 테죠. 진화는 불변하지만 그 방향성은 우리가 결정할 수 있습니다. 한글이라는 언어가 빈곤한 방향으로 진화할지 풍부한 방향으로 진화할지는 우리가 선택하는거죠.


요즘 정말 많은 외국인들이 한글을 배우고 있습니다. 인터넷 여기저기에서 외국인들이 한글/한국어를 질문하는 글들을 봅니다. "이 단어는 한글로 뭔가요?"라는 많은 질문에 "한글로도 그거에요" 식의 답변을 보면서 한글 어휘의 빈곤을 많이 느낍니다. 심지어 같은 단어인데도 누구는 "이렇게도 씁니다", 누구는 "저렇게도 씁니다" 하면서 혼란스러운 모습도 많이 보입니다.




한국인들에게 가장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무어냐고 물어보면 아마 10명 중 9명은 한글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과 사회가 그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을 사랑하고 아끼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 한글이 더 풍부하고 멋진 언어가 되도록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느냐 묻는다면 10명 중 1명도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한글과 한국어를 윤택하고 멋지게 만드는 일은 외국어/외래어 사용을 최소한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 대단한 일이냐고 물을 수 있겠지만 현재 한글 고유의 단어들은 빠르게 사라지고 그 빈자리를 외국어/외래어가 대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축구로 따지면 감독 입장에서 경기에 선발할 수 있는 선수 명단에서 선수들이 점점 사라지는 것, 레고로 따지면 쌓을 수 있는 레고 블록의 종류가 점점 줄어드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외국어/외래어를 한국어/한글로 대체하기 위해서는 원래 단어의 음절수와 최대한 비슷한 수를 유지하면서 그 의미를 살려야 합니다. 그것은 매우 어렵고 까다로운 작업이자 상당한 언어/문학적 해석력과 창작력이 요구되는 작업입니다. 영화/드라마를 보면서 영어 -> 한글 / 한글 -> 영어 번역이 원문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고 비판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영상 번역의 경우 빠르게 신들이 지나가게 때문에 최대한 원래 언어의 속도와 길이에 맞게 번역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매 문장마다 원문의 맛을 살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인거죠. 어쨌든, 우리가 사랑하고 자랑스러워마지않는 한글/한국어가 풍부해지는 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화초를 키울 때 먼지 털어주고, 때때로 볕이 좋을 때는 볕에 놔주고, 물을 주고, 분갈이를 해주는 등 많은 노력이 필요하죠. 언어를 지키고 발전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작업 중 하나가 외국어/외래어를 한글/한국어로 바꾸는 작업인것이죠. 그런 작업 속에서 우리는 무조건적으로 외국어/외래어에 어휘의 자리를 내주는 대신 한글 고유의 아름다운 말들을 계속 창조해내고, 기존의 말들을 발굴하고 새롭게 재해석하면서 한글의 동시대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어렵지만 창의적인 작업들이 반복된다면 한글의 영역은 점차 넓게 확장되겠죠.




글의 내용이 중반을 지나면서 조금 변하긴 했지만, 요점은 정말 우리가 한글을 사랑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냐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적어도 그러길 원한다면 우리가 지금 한글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 지 언어 사용을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죠. 우리가 지금 얼마나 한글을 체계와 질서없이 마구잡이로 쓰고 있는 지, 얼마나 외국어/외래어를 남발하면서 한글이라는 언어를 사막화시키고 있는 지 인지해야 한다는 말이죠. 아마 이 모든 건 우리가 의식하지 않고 그저 관성에 이끌리는 대로 행동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식적인 변화는 '관성'을 거스르는 데서 출발합니다. 무의식적으로 쓰는 많은 외국어/외래어, 거칠고 상스러운 말들을 의식적으로 걸러내야 합니다. 그런 의식적인 노력 없이 한글의 사막화에 작게나마 "이바지"하고 있으면서 "한글이 다른 언어보다 위대한 이유" 등의 비디오를 보며 거하게 취하는 것만큼 어리석고 공허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ps.

영어나 다른 언어를 잘하시는 분들은 많은 경우 일상 생활에서 외국어/외래어 사용을 최소화하고 "우아한 한국어"를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언어의 중요성을 아시는 거죠. 일상 생활에 쓸데없이 영어 발음을 굴리고 외국어/외래어를 많이 쓰시는 분들은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빈수레란 실로 요란한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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