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그리움은 익숙함이 이질감으로 바뀔 때 정의된다

연극 <러브레터>

by 조쉬코쉬

#1. 오랜만의 연극

2022년 11월의 어느 날, 아는 동생이 예술의전당으로 연극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했다. 자신의 고모할머니께서 연극을 하시는데 제목이 <러브레터>라고 했다. 당시 문화생활이라고 하면 영화관 아니면 넷플릭스였는데, 그것도 질릴 때쯤이라 솔깃한 제안이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연극을 본 게 언제였더라…



#2. 강렬했던 첫 연극

처음으로 연극을 봤던 건 열여덟 살 때 6월의 어느 토요일이었는데 학교에서는 곧 다가오는 6.25를 기념해 6.25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연극을 보는 것으로 현장학습을 대신했다. 극장에 앞에서 각 반은 이열 종대로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한창 사춘기였던 우리들은 땀 냄새를 풀풀 풍기며 낄낄거리며 떠들었고, 단 1분도 이성적인 대화라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때 담임 선생님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리를 주목을 끌었다.


“자자, 이제 들어갈 건데 몇 가지 당부를 하자면,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가지 않게 연극이 시작되면 절대 떠드는 일은 없어야 한다. 그리고 연극 중에 ‘어떤 장면’이 나오더라도 소란 떨면 안 된다. 선생님이 뒤에서 다 지켜보고 있을 거야. 알겠어?”

‘웅성웅성’

“알겠냐고!”

“아 네에!!!”


선생님이 ‘어떤 장면’이라는 부분에서 의도적으로 힘을 주듯 말했기 때문에 어떤 장면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장면이라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우리의 대답은 힘찼지만 선생님은 못 미더워하는 듯했다. 그런데 연극이 시작되고 절정에 이르자 나는 선생님이 말한 어떤 장면이라는 게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쟁 속에도 사랑은 피어났다. 비극적인 전쟁이 두 남녀의 평범한 행복을 억압함으로써 계속해서 절망 속으로 내몰수록 다양했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모두 욕정으로 수렴해 갔다. 결국 클라이맥스에서 두 남녀는 거칠고 격정적인 사랑을 나눔으로써 욕정을 분출했다. 실제로 여주인공은 저고리를 벗고 하얀 살갗을 드러내며 남주인공과 격정의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했고 그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우리 대신 주변의 힐난을 감당해야 했던 선생님께는 죄송한 일이지만 결국 우리는 호들갑 떨지 말라는 당부를 지킬 수 없었다. 애초에 혈기 가득한 사춘기 남고생들에게 그런 장면을 보여주면서 차분한 대처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실수였다. 아무튼 연극은 영화보다 훨씬 더 직접적인 예술임을 그때 알게 되었다. 첫 연극은 그만큼 강렬했다.



#3. 연극 <러브레터>

연극 <러브레터>는 1988년에 시작해 지금까지 꾸준히 공연되고 있는 스테디셀러 작품이었다. 이 연극은 여주인공 '멜리사'와 남주인공 '앤디'가 50년에 걸친 그들의 러브레터를 읽는 것으로 진행된다. 편지의 낭독만으로 모든 감정을 연기해야 하기 때문에 배우에게는 깊은 내공이 요구되겠지만, 그래서 더욱 배우에게는 도전해보고 싶은 작품일지도 모른다.


편지 낭독이라는 독특한 방식 때문인지 나로서는 마치 라디오에서 사연을 듣는 것 같기도 했고, 내 러브레터를 누가 대신 읽어주는 것 같기도 했다.



#4.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연극은 2시간 정도였고 짧다고 생각되진 않았다. 두 원로 배우들은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줬다. 연극이 끝나고 조명이 어두워지면서 침묵이 잠시 그 자리를 대신했다. 서서히 장내가 밝아지자 곧바로 박수갈채가 장을 가득 메웠고 어느새 나란히 서있는 두 배우를 향해 조명이 쏟아졌다.


그러나 나는 곧장 연극이 끝났음을 실감하기는 어려웠다. 소년소녀로 시작해 두 노인으로 끝마침 되는 여정에 더 남은 이야기가 있을 것만 같았다. 밝은 조명 아래에서 인사하는 두 원로 배우의 모습은 노인이 된 멜리사와 앤디의 모습을 상상하게끔 자극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비슷한 나이대였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몰입감 있게 연기를 해낸 이유도 컸을 것이다.


이미 새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칼과 주름진 얼굴로 환하게 웃어 보이는 노배우를 보면서 문득 직업이란 무엇일까, 라는 생각이 스쳤다. 나랑 같이 연극을 보러 간 동생은 사전에 할머님을 60년 가까이 연기를 해오신 분이라고 소개했다. 직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드는 지점이었다.


물론 한 가지 일에 평생 전념하는 것이 옳고, 그렇지 못한 것이 옳지 못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60년을 하나의 일에 몰두할 수 있고 지금도 여전히 열정을 가지고 활동한다는 점은 돈과 명예를 떠나 본인이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면 좀처럼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저분의 연기로부터 능숙함 보다는 조금 더 잘 해내고 싶은 사람이 풍길만한 어떤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다. ‘분명 일을 즐기는 분일 거야.’ 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비록 나와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를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서 생각해 본다면 꽤나 존경스러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었다.



#5. 연극이 끝난 후

오랜만의 연극이어서였을까. 2주가 흐른 뒤에도 여전히 잔잔하게 또 문득 떠오르곤 했다.

감성적이고 말괄량이인 멜리사와 올곧고 이성적인 혹은 그런 것을 추구하는 앤디. 종종 비합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멜리사와 매 순간 합리적인 결정을 하려고 노력하는 앤디. 뿐만 아니라 앤디는 다소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눈치도 없었지. 당연히 멜리사는 그걸 답답해했고. 그처럼 서로 대조되는 캐릭터가 이야기에 입체감을 입히면서 잔잔한 즐거움을 선사했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멜리사와 앤디를 관념적으로 하나의 인격체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종종 그런 모순적이고 비합리적인 소용돌이 속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기도 하는 존재이니깐 말이다.



#6. 어떤 그리움

그러고 보니 두 배우가 연기를 통해 보여준 소년미, 소녀미가 왠지 모르게 아련하게 남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추억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질 때가 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어릴 때 즐겨보던 시트콤이나 영화의 한 장면을 유튜브로 볼 수 있는데, 문득 보이는 잊고 있던 시대의 향수가 어린 시절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으로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그리울 정도로 행복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마도 시간이 지날수록 그 시절과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이 아닐까?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도 없거니와 이제는 향수를 자극하는 어떤 장소도 제 모습을 지키고 있지 않으니 말이다. 어떤 그리움은 익숙함이 이질감으로 바뀔 때 정의되기도 하나보다.



#7. 편지

문득 '아직도 사람들이 편지를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떨어진 사람과 연락하는 수단으로써 편지는 이제 기능적으로 우월하지 않다. 속도 측면에서만 생각해 보면 봉화나 비둘기보다도 못하다. 그러나 봉화는 기능을 상실하고 지금은 역사의 유물로서 존재할 뿐이고, 비둘기의 경우는 기능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사람도, 비둘기 본인도 굳이 서로를 원하는 것 같진 않다. 그러나 편지는 소통 수단으로써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사실 생각해 보면 편지가 가지고 있는 불편한 점들은 꽤 많다. 예를 들면, 한번 쓰면 고치거나 되돌리기 어렵고, 보안에 취약하고, 편지지 고르는 일도 여간 까다로운 일은 아니며, 우체통은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느리기까지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길을 가다 보면 문득 우체통이 보이기도 하고 종종 편지를 쓰고 싶은 마음이 들거나, 쓰는 일이 생기기도 한다. 구체적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하고싶은 말을 SNS로 하는 것과 편지로 전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그것은 <나는 솔로> 같은 연애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마지막 날에 가까워지면 출연자들은 진심을 다해 쓴 편지를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전달하고, 그걸 받은 상대방은 편지를 읽으며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곤 한다.


아마도 편지에는 정성이 깃드는 신비한 힘이 있는 게 아닐까? 편지에는 애틋함, 기다림, 설렘, 진심이 꾹꾹 담긴다. 받는 이도 그런 걸 느끼기에 보답하듯 정성스럽게 읽게 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SNS와 비교해서 편지로 받은 내용들은 썩 기억이 남는 편이다.


아마도 편지의 매력은 그 불편함에 있는 것 같다. 요즘처럼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즉각 할 수 있는 세상이기에 그런 매력은 더욱 부각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연극 <러브레터>에서 ‘편지'라는 소재는 그 자체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매우 훌륭한 소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여전히 잔잔하게 떠올리게 만드니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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