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떤 것보다 인간에 관한

김영하 <작별인사>

by 조쉬코쉬

이 책을 받아들이기까지는 몇 개월이 걸렸다.


종로의 한 서점이었다. 천천히 서점을 둘러보던 중 어느 매대 위에 멈췄다. 베스트셀러였는지, 이달의 추천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철제 매대 위에서 이 책을 보았고, 같은 책들은 복제품처럼 쌓여있었다.


‘김영하’


이제는 너무 유명인이 된 한 작가의 이름이 보인다. 그리고는 바로 그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이 되어 버린 알쓸신잡이 떠오른다, 그의 작품이 아니라.


한때 그의 담백함을 좋아했기에 그의 신간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쌓여있던 책들 중 가장 밑에 있는 책 한 권을 빼내 손에 들었다. 그리고 무심히 다른 책들을 마저 구경하다가 결제처 앞에 섰고, 고민했다. 어쩌지... 살까? 책을 앞뒤로 이리저리 돌려보면서 결제를 할까 말까 더 고민을 하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결제를 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문득 이 책의 평가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의 평가를 굳이 찾아보지 않았던 평소와는 달랐던 점이었다. 아마도 그가 대중인사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유명 작가라서 그랬을까?


대체로 평이 좋지 않았다. 내가 작가라면 상처가 됨직한 박한 평가들도 눈에 띄었다. 이 책이 SF소설이라는 것을 안 것은 그때였다. 콘텐츠 유형을 불문하고 그동안 한국에서 SF장르로 실패한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쯤 되면 클래식한 SF에 대한 미련은 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읽기 전부터 괜히 실망감이 들었다. ‘에이 괜히 찾아봤네.’ 내가 평소에 다른 사람의 평가를 보지 않는 이유다.


그날 저녁 이 책은 그대로 내 책장에 꽂혔다. 예기치 못한 변덕으로 다시 이 책을 꺼내게 될 때까지 이 책으로서는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된 것이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나갔고, 수없이 책장을 지나다니며 가끔 이 책에 눈길이 갔던 적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우선순위는 아니었다. 이 책의 존재가 점점 부담스러워지기도 했으며, 이 책이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공간마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올해 3월쯤이었을까, 역시 같은 생각을 하면서 바쁜 일을 마치고 나면 읽고 해치워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미안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마침내 올해 4월 바쁜 일이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나는 묵혀둔 책을 꺼내 들었다. 그렇다면 어찌 됐든 앞으로 며칠간은 개별성이 부여될 것이다.


책을 읽기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때 봤던 박한 평가들이 떠올랐다.

‘정말 SF장르네.’


익숙하지 않은 장르를 쓰는 데서 오는 조심성이 느껴진다는 것은 단순히 내 편견일까? 몰입이 어려웠다. SF장르라면 훨씬 더 과감한 상상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것도 과하면 공감대를 얻기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부족해지면 한없이 유치해질 뿐이다.


작중 2030년이라는 시점을 꽤나 먼 과거로 상정하고 있는 시간적 배경을 미루어 봤을 때라면 더욱더 그렇다. 단순히 지금도 존재하거나, 잘 알려져 있는 모습들을 먼 미래의 모습이라고 나열하는 식으로는 역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 미래의 모습으로 묘사하는 상상력에는 일관성이 다소 부족했고, 묘사하는 기술은 이미 지금도 있는 것이어서 그러한 미스매치가 약간 유치하게 느껴졌다는 점은 사실이다.


이런 측면에서 유독 아쉬웠던 점은 이 책의 삼분의 일 지점이었다. 서울이나 평양이 첨단 도시로 깔끔하게 유지된다는 표현은 이야기를 통해 독자가 자연스럽게 느껴야 할 부분을 일방적으로 강요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성의가 부족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유전자 배양육이나 도시형 농장에서 길러지는 채소, 홍채인식 등에 대한 묘사도 마찬가지다.


왜 굳이 SF배경을 선택한 건지 더욱 궁금해졌다. 단지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어서? 아니면 그 배경이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어서? 그러나 그 궁금증은 책의 절반이 넘어갈 때쯤 해소되고 있었는데 그걸 알아챈 건 또 나중의 일이다.


우주, 정신, 개별성, 인간의 기계성, 기계의 인간성.


이 책이 나온 시점이 코로나가 끝날 때쯤이었던 2022년이라고 한다. 당시 우리는 격동의 시대를 살았음에 분명하다. 뉴노멀의 시대를 열어젖힌 그 사건 이후로 먼 미래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다소 막무가내 식으로 우리 앞에 다가왔다. 비대면, 코로나 세대의 탄생, 인공지능 같은 것들 말이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우리는 그 외생변수의 변화에 적응해야만 한다.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의 변화는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랑스럽게 여기는 적응력은 다시 한번 증명의 무대 위에 놓여졌다. 인간의 생존과 인간이 이룩한 유산의 보존을 위해서, 그건 필멸의 인간이 맞이한 불가피한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존재의 고민’은 그 어느 때보다 인간의 운명의 중요한 한 갈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명암의 전망 모두를 가지고 있는 인공지능의 시대에서 인간은 어떤 존재일 것인가, 나아가 인간과 완벽하게 똑같이 만들어진 기계는 어떤 존재인 것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아마도 김영하는 이 소설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더욱 깊이 알기 위해서는 인간이 아닌 존재,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존재들의 ‘존재’는 불가피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 작별인사는 단순한 삼류 SF소설이 아니라 그 어떤 소설보다 인간과 인간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에 대한 평가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클래식 SF장르와 달리 해야 한다. 이것은 존재의 본질에 관해 이야기하므로 철학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을 철학이라고 생각한다면 이건 말도 안 되게 흥미롭게 쓴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이 소설은 인간과 기계를 하나로 묶을 범주의 도구로써 ‘우주정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했다. 그리고 인간과 기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진정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지, 앞으로 다가올 인공지능의 시대에 앞서 무엇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 시대에 요구하고 있다. 또한, 작중 인물이 보여주는 정체성의 혼란은 어쩌면 먼 미래에는 누구든지 흔하게 겪을지도 모를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점은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특히, 후반부에 “어디까지가 나라고 할 수 있는 건가?”라고 묻는 장면은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되는 장면이다. 그 질문은 비단 먼 미래의 존재만을 위한 질문이 아니라 존재의 불안정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 해봐야 할 시대의 질문일 것이다.


책을 덮고 집으로 향하다가 화단에 작고 낮은 나무를 발견했다. 심은지 얼마 되지 않은 나무였으나 이내 봄이라며 꽃망울을 터트리기 직전이었다. 희망과 설렘이 느껴졌다. 다시 발걸음을 내딛으며 고개를 드니 바람이 한 줌 지나가며 머리칼을 들어 올렸다. 환하게 만개한 벚꽃이 한가득 시선을 채웠다. 아름답다, 처절한 아름다움이다.


‘며칠이나 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지겠지. 내일 져도 이상하진 않겠지.’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꽃이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고, 그것의 자각 역시 내가 필멸의 존재일 수밖에 없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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