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한 현인의 일생에 대한 이야기로, 그가 어떤 과정으로 자아와 진리를 찾게 되는지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형이상학적 의미를 막연히 궁금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런 내게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경지로 가는 여정의 한 모습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여정은 매우 신비로웠고 인상적이었으며 이 소설을 쓴 헤르만 헤세에게는 그저 순수한 존경심을 표하고 싶다. 따라서 소설 <싯다르타>가 보여주는 깨달음이 진정한 모습이 맞는지 아닌지, 이것이 단지 소설일 뿐인지, 헤르만 헤세는 어떤 배경으로 이 책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가 읽는 내내 즐거운 마음으로 책을 읽었다는 것이며, 어느 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있을 만큼, 또 어느 정도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내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 깨달음은 현재 내가 느낄 수 있을 만큼의 깨달음인 것이고 필요한 만큼의 깨달음인 것이므로 이 점이 이 책을 오랫동안 곁에 두고 싶은 이유이며, 멀지 않은 날에 이 책을 다시 꺼낼 순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 페이지를 뒤로하고 책을 덮은 후 잠시 인상적이었던 부분들을 떠올려 보기로 했다. 사전을 살피듯 책을 뒤져가며 찾을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이대로도 내게 남아있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래, 먼저 <싯다르타> 내에서 ‘윤회’는 중요한 의미였다. 그리고 윤회에 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싯다르타>에서의 윤회는 단순히 이번 생에서 다음 생으로 끊임없는 반복되는, 그런 직접적이고도 피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책을 읽으면서도 느꼈던 부분이고, 이 책을 모두 읽은 이후에도 느꼈던 부분인데, 그것은 <싯다르타>의 주인공인 싯다르타의 삶 그 자체가 윤회였다는 점이다. 소설에서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진 않았다. 다만 그것은 오히려 간접적이었기 때문에 보다 본질적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것이 첫 번째로 내 감상에 남은 강렬한 여운이다.
다음으로 싯다르타의 깨달음이 단번에 완성된 것도, 누군가의 가르침으로 비로소 얻어진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는 삶에서 몇 번의 깨달음을 얻었고 그때마다 어느 정도의 확신도 가졌으나 실패와 방황, 좌절, 욕망으로 무너지는 모습도 함께 보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그것들 마저도 깨달음의 소중한 재료로서 승화시키는 성숙한 모습도 보였는데 어쩌면 그의 깨달음이 내게 설득력 있게 느껴졌던 것은 바로 그 불완전한 인간의 면모 때문은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인상 깊었던 부분은, “우리의 내면에는 지금 그리고 오늘 이미 미래의 부처가 깃들어 있다.”과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네,”라고 한 부분일 것이다. 이 문장들은 특히 오래도록 기억에 남게 될 것 같다. 아울러 싯다르타가 지체 높은 바라문의 삶, 고고한 사문의 삶, 쾌락을 추구하는 탕아의 삶 같은 다양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완성된 자’가 됐다는 것은 ‘완성’이 결코 일방향적이고 선형적인 성공의 궤도를 통해 도달되는 것이 아니라, 싯다르타의 삶처럼 이미 우리의 내면에는 그 자체로 탄생과 죽음, 살인자와 성자, 아기와 노인, 선과 악, 그리고 중생과 부처의 모습까지 모두 내재되어 있다는 단일성으로의 귀결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글을 마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나 범위를 넓히면 모든 속성은 하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가끔은 어떤 일이 고통스럽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정말 그 일의 속성에는 고통뿐인 걸까? 그렇지 않다. 비록 당장은 고통과 고단함이 크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모든 것은 일면만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완전한 속성이라고 할 수 없다. 그 일에는 분명 고통과 고단함이 존재하는 동시에 즐거움과 보람됨도 함께 존재하므로 우리의 마음이 그 진실을 받아들일 의지만 있다면 고통과 즐거움, 고단함과 보람됨은 언제나 하나의 단일성을 갖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제의 적군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것처럼 서로 치고받으며 싸우던 사람들도 새롭게 등장하는 공동의 적이나 공통의 목표 앞에서는 손을 잡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연의 속성이다. 눈앞의 적은 현재 처한 상황과 관계를 정의하는 관점에 따라 잠시 그렇게 보일 뿐 그것 역시 영원하고 완전한 관계라고 볼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는 얼마나 많은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가.
남녀갈등, 세대갈등, 이념갈등 같은 타인과의 갈등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혐오하고 사랑하지 못하며 행복과 번뇌라는 이분법적인 분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내면의 갈등은 여전히 시대와 세대를 초월한 갈등일 것이다. 그러나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향한 시야를 넓혀보면 언제나 모든 것은 하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남녀노소라는 갈등의 한 갈래를 내가 사랑하는 가족의 범주로 옮겨보면 그것들은 더 이상 갈등의 대상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물론 모두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이상적인 세상이니깐 말이다. 모든 사람이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해야 한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을 그렇게 바로 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세상의 갈등이 점점 심화되는 것이 심각하게 걱정되는 사람이 있다면,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복잡한 세상 문제는 차치하고 자신의 삶 앞에 놓인 갈등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한 번쯤은 모든 존재에는 모든 속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범위를 넓혀 생각해 보면 사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며, 나를 힘들게 하는 누군가도 사실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은 얼마든지 해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세상만사는 오로지 나의 동의, 오로지 나의 흔쾌한 응낙, 그리고 나의 선선한 양해만을 필요로 할 뿐”이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