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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안나 신 Feb 28. 2018

내가 한국을 떠난 이유 (1)

홀로 해 온 10년간의 해외 생활, 그 뒤에 감춰진 '진짜' 이야기

'유학 갈 거야'라는 한마디 말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했는지 모른다. 아버지의 부재로 인해 집안 형편은 넉넉지 않았고, 두 살 터울의 오빠는 이미 장학금으로 사립고에 다니고 있었던 반면 나는 특출 나게 학교 공부를 잘하지도, 그렇다고 유학생들만큼 영어를 잘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전까지 외국에서 살아본 적도, 공부해본 적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벗어나고 싶었다. 시험에 나오니까 외우라고 적어주는 걸 머릿속에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가 시험 볼 때 몽땅 토해내는 것 말고, 내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만 머릿속에 오래도록 남기고 싶었다. 45분 내내 듣기만 하다가 수업 종료 전 마지막 5분에 몰아 질문하는 것 말고, 수업 중간중간 의문 가는 점은 묻고 토론하고 싶었다. 남들이 정해주는 꿈 말고, 내가 잘 하고 또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찾고 싶었다.


나는 초등학교 6년, 그리고 중학교 3년 동안 또래의 아이 치고는 한국 사회와 교육 시스템에 대해 꽤나 깊은 염증을 느꼈고, 당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돌파구는 '이 나라를 뜨는 것' 뿐이었다.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한 꿈이었음에도 나는 그 꿈을 버릴 수 없었다. 유학의 꿈이라도 꿔야 나쁜 길로 빠지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본격적 유학 준비, 그리고 내 인생의 암흑기

주변 사람들이 나를 불효녀라 손가락질할 때도, 어머니는 나를 믿어주셨다. 당신은 끼니를 거를지언정 (당시에는 무지하게도 그런 줄 몰랐다) 딸내미는 간신히 턱걸이로 합격한 외고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지지해주셨다. 그렇게 입학한 외고에서의 3년은, 참으로 감사하면서도 힘들었다.


영어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어 처음으로 본 미국의 수학능력시험인 SAT에서 2400점 만점 중 1900점을, AP에서는 5점 만점 중 2점을 받았다. 영어 공부라고 해봐야 기껏 토플 공부나 해봤던 내게 영어로 배우는 미국 교과 과정은 너무나도 낯설고 어려웠다. 그렇다고 한국 교과과정으로 돌아가 수능을 준비하기엔 이미 늦어버렸고, 원 계획대로 장학금을 받고 미국 유학을 가기엔 내가 너무 부족했다.


또, 어울릴 수 없었다. 사립학교의 특성상 모두가 부족함 없이 자란 내로라하는 집 자식들이었다. 자연스레 우리는 관심사도, 고민거리도, 그리고 씀씀이도 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반 친구들을 따라간 압구정의 한 카페에서 3만 원이 훌쩍 넘는 샌드위치를 보고 놀랐던 때의 그 느낌을, 나는 10년이 넘은 지금까지 생생히 기억한다.


기댈 곳 하나 없었던 학교 생활과 나를 무한하게 믿어주신 어머니 사이에서, 한동안 어찌할 바를 몰라 참 많이 울었다. 유학의 꿈을 택한 나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어디인지에 대한 고민을 수도 없이 했다.


위를 보느냐, 아래를 보느냐의 차이

그렇게 눈물과 좌절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SK에서 후원하는 베트남 봉사활동에 참가하게 됐다. 내 또래 친구들과 베트남전 접전 지역 중 한 곳에 머물며 마을 재건을 돕는 해외 봉사 프로그램이었는데, 시골 마을 홈스테이 당시 밤에는 전기가 끊겨 촛불과 손전등을 사용했고 수도시설이 없어 목욕은 대야에 받아놓은 빗물로 했다.


난생처음 해본 경험이었고, 물론 불편했다. 그러나 불편함보다 더 큰 건 부끄러움이었다. 내가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전기와 물이 없는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이들을 보며 줄곧 나보다 많이 가진 이들만 바라보며 열등감의 수렁에 빠졌던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나는 변했다. 내게 결여된 것보다는 주어진 것에 대해 생각했고,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보다는 바꿀 수 있는 것에 시간과 에너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자연스레 성적은 올라갔고,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원서 접수 당시 나의 SAT 점수는 2250점이었다. 적어도 도전하기 터무니없는 성적은 아니었다.


돈, 돈, 돈

모조리 낙방이었다. 단 한 곳, 드림스쿨이라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은 NYU 스턴만 빼고.  어차피 못 갈 학교에서만 합격 레터가 날아온 상황이, 한편으로는 위로가 되면서도 서글펐다. 돈 걱정 없이 어디로든 떠나는 친구들을 보며 나는 또다시 수렁에 빠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알바를 시작했다. 카페에 들어오는 손님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음료를 만들다 보면 공부와 미래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그렇게 알바로 학원비와 원서비를 모으며 틈틈이 원서 준비를 했고, 나의 두 번째 유학 입시는 NYU 스턴 재합격 (물론 장학금은 없었다)과 홍콩대학교 장학금 합격으로 끝이 났다.


이제 더 이상 고민할 여유는 없었다. 좋든 싫든 홍콩에 가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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